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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콜릿책방지기 Jan 27. 2023

<사촌 퐁스>

소설 안에서 살아있는 생생한 인물들을 만나고 싶을 때

   “사실주의 거장”이라고 하는 발자크 소설의 미덕과 묘미는 다양하게 찾을 수 있겠지만, 소설 안에서 인물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것처럼 느끼게 하는 묘사가 제일 큰 매력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실주의가 한물갔다고 말하고 있는 요즘 소설에서, 여전히 발자크가 유효하고 재밌게 읽히는 이유는 바로 그런 점 때문일 것 같다. 


   탁월한 배경 묘사를 통해서 인물의 심리를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경우도 있고, 대화를 통해서 인물의 상태를 보여주는 경우도 있지만, 발자크의 압도적 재능은 세심하고 섬세해서 장황하게도 보이기도 하는 인물에 관한 묘사다. 주인공 퐁스에 관한 묘사는 시작부터 장장 10페이지가 넘게 이루어지는데, 그를 묘사할 수 있는 것이라면 복장에서부터 예술애호가적인 특성까지 두루 망라한다. 이미 소설의 시작부터 우리는 퐁스라는 인물을 성근 스케치가 아니라 자세한 유화 그림으로 보면서 이야기를 향해 나아가게 된다. 


   이런 특성은 언뜻 보면 부수적 인물처럼 보이는 마르빌 부인에서부터 프레데릭, 시보댁이라든가, 프레지에, 레모냉크, 토피나르까지 거의 모든 인물에게 적용된다. 그러니까 우리는 당시 파리에 살고 있던 다양한 인물 군상들을 발자크를 통해 생생하게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아마도 다양한 인물들에 대한 묘사 때문에 이야기의 흐름이 방해를 받았다면 우리는 지금 더 이상 발자크를 읽지 않을 것인데, 여전히 읽고 있는 이유는, 인물들을 모두 끌고 갈 수 있을 만큼 이야기의 힘 또한 강력하기 때문이다. 퐁스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보여주는 당시 파리의 모습은 지금 우리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낄 만큼, 인간의 다양한 면모를 치밀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때로는 진저리를 치면서, 발자크의 유머에 가끔은 마음을 풀고 씩 웃어넘기면서, 현실을 잠시 잊고 싶었던 독자들마저 혀를 내두르며, 지독하게 현실적인 소설을 애정하게 되는 것이다.  



* 좋은 문장들 중 몇 가지


10쪽. 자연은 이 남자에게 사랑의 표현을 금지한 듯했다. 이를 어기면 여인을 웃게 만들거나, 몹시 마음 상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프랑스인은 이런 불행 앞에서 입을 다문다. 여성의 마음을 끌지 못하다니, 그것은 불행 중에서도 가장 잔인한 것이었다. 

15쪽. 인생의 만사가 자신이 세운 이상에 미치지 못하는 운명에 처한, 감수성이 풍부하고 섬세한 사내가 행복해질 수 있는 한도만큼 행복했다. 

20쪽. 이렇게 교육받은 위장은 미식의 지혜를 얻었으므로 반드시 정신에 영향을 미쳐서 그것을 타락시킨다. 마음의 모든 주름마다 웅크려 있는 쾌락은 여왕이 되어 명령하고, 의지와 체면을 맹렬히 밀어내어 어떤 대가를 치루더라도 충족되고자 한다. 여태껏 주둥이 폐하의 욕구는 제대로 묘사된 적이 없다. 먹고사는 문제에 가려져서 문학적인 비판을 면했다. 하지만 밥상으로 파산한 이들의 수는 상상을 초월한다. 

53쪽. 퐁스는 모든 곳에서 속내 이야기들을 받아 주는 일종의 하수구로서, 입이 무겁기로 알려져 있었고, 또 그럴 수밖에 없었다. ... 따라서 그는 더 이상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는 하나의 위장에 불과했다!

72쪽. 인정받지 못하는 천재보다 더 슬픈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인정받지 못한 위장이다. 

81쪽. 그러나 오늘날 허구가 진실과 유사해지기란 매우 어려운 만큼, 진실은 허구와 비슷하다. 

91쪽. 정신의 병은 몸의 병에 비해 엄청난 이점을 가졌다. 욕망의 대상을 누리지 못한 박탈감 때문에 생기는 반면 그 욕망이 충족되었을 때 순식간에 치유된다. 

180쪽. 아니, 참말, 거꾸로 된 세상이야! 혁명은 왜 하는 거요? 거지 같은 부자들아, 돈 있으면 저녁 두 번 먹어라!

197쪽. 광고가 전능하고, 빈자를 위로하여 스스로 부유한 시민이라고 믿도록 콘코드 광장의 촛대에 금색을 입히는 시대에, 어느 환자가 명성도 가구도 없는 의사의 실력을 신뢰하겠는가?

226쪽. 파리에 거주하는 이들에게 온갖 직위들이 얼마나 많은 탐욕의 대상인지 상상하기란 어렵다. 파리에 사는 것은 욕망 전체에 노출되는 격이다.

298쪽. 퐁스는 떠나기 직전에 세상에 대해 알게 되었다. 몇 시간 전부터 그는 모든 것을 풍자와 냉소의 대상으로 삼는 예술가처럼 즐겁게 운명을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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