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초콜릿책방지기 Feb 13. 2023

<바다와 독약>

일본 작가에 대한 편견이 있다면 이 소설을 권해드립니다.

   평범한 회사원이 신흥주택지로 이사하면서 만난 의사, 주유소 주인, 양복점 주인을 통해 10년 전 전쟁이 남긴 흔적들을 보게 된다. 극히 평범해 보이는 주변 사람들이 어쩌면 전쟁 중에 사람을 죽이거나 비인간적인 일에 연루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서, 인간은 어쩌면 스핑크스의 수수께끼와 같은 존재가 아닐까 생각한다. 어떤 상황에 처했느냐에 따라서 네 발, 두 발 혹은 세 발이 될 수도 있는 존재 말이다. 


   소설은 대학병원에서 일어난 미군 포로 생체해부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여러 인물의 입장을 통해서 보여주면서 인간 존재의 의미와 양심의 문제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던진다.  소설을 열어주는 회사원은 이미 사건이 지나가고 난 후에 그 사건이 어떤 의미를 남기는지 묻는다. 누구나, 자신조차도 그 자리에 있었다면 비껴갈 수 없었을 일에 대해서, 나라면 다른 선택을 했을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화자가 그 사건에 대한 관심을 환기하면서 이어지는 병원 내부의 이야기는, 우리가 피상적으로 알고 있던 의사들에 대한 환상을 깨고,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마치 난폭운전을 위한 면허증 정도로 사용하고 있는 의사들을 만나게 한다. 전쟁 상황과 의사들의 태도를 보면 그런 사건이 벌어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수순처럼 느껴질 정도다. 권력암투와 무기력한 인간들이 모여서 만들어내는 선택이 과연 얼마나 자유롭고 인간적일 수 있을까. 


    사건에 대한 내용은 세 명의 인물을 통해서 드러나는데, 우에다 노부 간호사의 증언록으로 먼저 시작한다. 도덕적인 면도 인간적인 면도 없는 남편의 태도, 하녀를 때려야 말을 듣는다는 가치가 통하는 역시나 비도덕적인 생활환경, 성녀처럼 행동하는 힐다에 대한 원한과 반감 등 개인적 불행으로 인해 도덕적 기준이 와해되는 인간의 모습을 간호사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이어지는 토다의 증언록은 타고난 양심이란 존재하지 않고 사회적 눈이 더 중요할 뿐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들키지 않는 이상 죄는 없다. 토다는 죄와 양심의 기준에 대한 다른 태도를 보여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스구로의 내면은 양심의 문제로 고민하는 존재, 하지만 개인의 힘으로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무기력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들의 의식에 때때로 침투하는 바다의 존재는, 어둡고 울부짖는 존재, 대답하지 않는 존재인데, 아무것도 해주지는 않지만 마치 대신 울어주는 것 같다. 예민하고 깊이 있는 문제의식을 간결한 문장으로 잘 드러낸 소설이라서인지 오래도록 질리지 않고 먹을 수 있는 담백한 빵처럼 느껴진다. 


매거진의 이전글 <그녀와 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