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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콜릿책방지기 Feb 25. 2023

<예브게니 오네긴>

오페라와 발레를 꼭 봐야겠어요.

   소설을 운문의 형식으로 읽는다는 건 확실히 다르다. 서사를 따라가면서도 저절로 리듬을 느끼게 된다. 비록 완벽한 형식미를 갖췄다는 찬사에 걸맞은 각운과 약강 4 보격 같은 형식들을 알아볼 수는 없지만, 번역의 과정을 거치며 모두 날아가 버리고 희미한 그림자만 남은 운율만으로도 일정한 리듬을 분명히 느낄 수 있다. 언어가 다른 한계를 어쩔 수 없으니 그 부분에 대한 안타까움은 크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다름의 한계를 뛰어넘으면서 우리에게 문학의 향기를 느끼게 해주는 수많은 명작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리듬을 타는 문장과 독자에게 말을 걸면서 종횡무진 활약하는 화자의 역할 때문인지, 자연스럽게 우리의 판소리와 고전소설이 떠올랐다. 우리의 고전소설은 수험생들만 읽고 러시아의 고전 푸쉬킨은 우리가 기꺼이 읽는 것인지, 그 차이에 대해 잠시 생각하게 되었다. 


   근대 이전의 우리 문학의 정수는 아무래도 양반들이 한문으로 쓴 작품들이었을 테니, 작가미상이 많은 조선시대 고전소설을 푸쉬킨의 작품과 동일선상에 두고 이야기하기는 어려울 것 같기는 하다. 따지고 보면 우리에게는 양반으로 불렸을 귀족들 이야기인데, 오네긴이라는 인물은 자신에게 주어진 귀족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있다. 그가 앓고 있는 우울증이라는 것이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서 지독한 무의미를 발견했기 때문인지, 그저 타고난 병증인지는 알 수 없지만, 당대의 삶 혹은 자신의 삶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임은 분명하다. 


   그런 그에게 사랑을 느끼는 따찌야나는 순박한 시골 귀족이다. 시골에서의 삶을 사랑하고 책을 읽고 사색을 즐기는 사람이므로 따찌야나 또한 평범한 귀족은 아니다. 남다른 사람이라서 오네긴과 같은 사람을 알아본 것일까. 사색하는 여인과 우울에 빠진 남자의 조합이 어울리기는 한다. 오네긴 또한 따찌야나를 알아본 것 같기는 하다. 자신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따찌야나에게 훈계를 해주니까 말이다. 온갖 쾌락을 다 경험해 본 오네긴에게 따찌야나의 사랑은 너무 쉽고 재미없고 시시할 따름이다. 


   오네긴의 충동으로 레스낀이 죽고, 올가가 다른 남자와 결혼하고, 다시 만난 따찌야나에게 사랑을 느끼는 것은 평범한 서사일 뿐이다. 평범한 서사에 재미를 부여하는 건 독자에게 말을 걸고, 당대 문학을 비판하고, 자신의 작품도 거침없이 객관화해서 말하고 있는 화자 덕분이다. 화자의 목소리는 날카롭고 유머 감각도 있고 매력적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푸쉬킨이라는 작가의 매력을 발견하기에는 부족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푸쉬킨을 이해하려면 좀 더 시간이 필요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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