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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콜릿책방지기 Feb 18. 2023

<여자아이 기억>

아니 에르노의 재발견

   기억은 시간과의 싸움이다. 지나간 시간, 즉 과거의 시간을 박제해서 현재로 다시 불러들이는 일이기 때문이다. 시간의 속성은 흐르는 것, 불가역적인 것인데 기억은 그것을 역행한다. 게다가 기억은 가변적이다. 기억은 사실이 아니라 개인적인 시간의 흔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상대적이다. 나의 기억과 타자의 기억은 언제나 다르고 기억하는 사건의 의미 또한 다르다. 


   10대에 경험했던 일에 대한 기억을 쓴 이 소설, <여자아이 기억>에서 기억이라는 제목은 소설을 관통하는 주제이자 소재이다. 타자에 의해 이루어진 일의 의미를 나중에 알게 되는 것과 자의에 의해 행동한 것의 의미 또한 새롭게 찾아내는 것 모두 기억에 의존해서 이루어진다. 그 기억은 사진으로 박제한 것마저 모두 개인적인 것일 수밖에 없지만 이 글이 소설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사회적으로 확장할 만한 가치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 초반에 나오는 당시의 일 중에서, 알제리 전쟁에 징집된 병사들이 전쟁이 끝나고 돌아온 후의 일에 대한 부분이 있다. 병사들은 돌아온 후, “전쟁을 겪지 않은 아이들과 친구가 되어야 했다. 그들은 현실에서 동떨어졌고, 말하기를 거부했다.”는 대목에서 보면 어떤 현실을 경험한 사람과 경험하지 않은 사람 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존재할 뿐 아니라 그들 자신도 이제는 그 현실이 비현실이 되어있는 상태가 된 것을 보여준다. 그 현실에 대한 의미를 깨닫기 위해서는 아마도 많은 시간이 흘러야 할 것이다. 그래서 당시에 그들이 느끼는 것이 이것밖에 없다. “그들은 자신들이 한 행위가 선한 것이었는지 악한 것이었는지, 자긍심을 느껴야 할지 수치심을 느껴야 할지 알 수 없었다.”(13쪽) 


   여자아이가 자신에게 벌어진 일에 대해 느끼는 것도 동일하다. 당시의 그녀는 심지어 자신이 읽고 있는 책에 대해서도 일관된 태도나 생각을 갖지 못한다. “그녀는 일정한 ‘나’를 갖고 있지 못하다. 그저 한 권의 책에서 다른 책으로 흘러가는 여럿의 ‘나’를 가질 뿐이다.”(34쪽)


    그런 여자아이가 자신의 시간을 거의 모두 통과하고 난 후, 지나간 기억을 들여다보는 것은 시간과의 싸움을 이겨낸 것이다. 그건 물론 자신과의 싸움에서도 벗어난 것이다. “어떤 일이 벌어지는 그 순간에 벌어지고 있는 일이 지닌 무시무시한 현실성과 몇 년이 흐른 후 그 벌어진 일이 띠게 될 기묘한 비현실성 사이의 심연을 탐색할 것.”이라는 의도를 지켜내면서 심연 속에서 성공적으로 빠져나와서 글쓰기를 완성했다. 


   우리는 아니 에르노의 이번 글쓰기를 통해서, 작가가 했던 것처럼 각자의 기억을 소환해 내어 촘촘하게 더듬으면서 그때의 의미가 단순히 개인적 잘못도 아니고 타자의 잘못도 아니며 사회가 빚어낸 아픔도 아닌 그 모든 것의 총합이라는 것, 그 경험이 가져가주는 의미의 부재는 우리 스스로가 채워가는 것이라는 걸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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