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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콜릿책방지기 Feb 27. 2023

<골짜기의 백합>

발자크의 페르소나

   그동안 읽은 작품 중에서 가장 발자크를 닮은 작품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가장 발자크와 동떨어져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했다. 자전적 이야기를 녹여놨지만, 작가의 자의식은 자신을 좀 더 이상화하는 쪽으로 기운 것 같다. 그래서 발자크를 읽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동시에, 그가 되고 싶었던 인물들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지만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는 힘들다. 조금은 더 비판적으로 볼 때도 있고 조금 더 미화시켜서 볼 때도 있다. 대체로 각자의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이상적 자아상 또한 존재할 것이라서, 그 상에 비쳐보면서 자신의 모습을 늘이기도 하고 줄이기도 할 것이다. 발자크는 이 작품으로 자신의 모습을 확장해보고 싶었던 것 같다. 


   발자크가 자신을 확장한 것처럼 보이는 인물, 펠릭스는 부모의 애정이 결핍된 어린 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어머니처럼 느껴지는 모르소프 부인에게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든다. 자신을 모성애로 감싸주는 모르소프 부인에게 지극한 애정을 느끼지만, 절개를 지키려는 모르소프 부인의 뜻에 따라 그녀의 가정을 지키려는 노력을 한다. 하지만 젊은 혈기를 정신적 사랑으로 모두 다스릴 수는 없는 법이었는지, 파리로 진출한 후 레이디 더들리와 육체적 사랑에 빠진다. 모르소프 부인 덕분에 파리에서 성공하게 되었는데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졌으니 배신은 맞지만 펠릭스의 행동이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다.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던 사교계의 부인들과는 다르게 모르소프 부인은 정신적 사랑만 추구하는 성녀처럼 행동하는데, 경험이 일천한 펠릭스가 사교계에서 다른 사랑을 만나면 흔들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펠릭스는 꽤나 비겁하게 레이디 더들리를 깎아내리고,(영국 여자가 무슨 죄인가!) 모르소프 부인에게도 자신의 행동을 변명하는, 따지고 보면 볼품없는 남자다. 펠릭스가 그런 사람이라는 사실은 나탈리의 편지로 쐐기를 박는데, 나탈리의 편지로 반전을 보여주는 게 발자크의 매력이 아닐까 생각한다. 아마 나탈리의 편지가 없는 채로 소설이 끝났다면, 발자크의 명성을 인정하기가 조금 힘들었을 것이다. 


   성녀 모르소프 부인의 사랑과 사교계를 주름잡는 레이디 더들리의 사랑을 동시에 받은, 성공한 정치가에 외모도 훌륭한 펠릭스라는 인물은 발자크가 되고 싶었던 인물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미화시키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펠릭스를 다시 볼 수 있도록 만드는 나탈리의 편지를 배치한 천재 소설가에게 저절로 박수가 나왔다. 안타까운 점은 펠릭스와 모르소프 부인의 사랑에 더 이상 깊이 몰입하기 어려울 만큼 나이든 독자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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