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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콜릿책방지기 Jul 08. 2023

<오향거리>

메타 픽션을 재밌게 경험하고 싶다면

   소설은 X여사의 나이에 대한 분분한 의견, 추측으로 시작한다. 분명 구미가 당기는 도입부다. 독자도 같이 궁금해져서 계속 읽기 시작한다. 읽다 보면 문득 생각이 든다. 그런데 X여사의 나이가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녀의 나이는 어째서 가늠하기가 힘든 것인가. 


   쉽게 알아채기 힘든 이유는 던져주는 단서가 지나치게 많기 때문이다. 오향거리에 이주해 온 X여사에 대해 그곳 사람들은 모두 각자의 의견을 갖고 있는데 그 의견에 따라서 독자는 추측해야 한다. 그들은 모두 나름 논리적이고 의미 있는 의견을 말해주는데, 그 의견들이 제각기 달라서 독자가 대략 구체화시켜 놓은 X여사의 나이(혹은 외모를 비롯한 형상화된 인물형)가 자꾸만 깨져간다. 읽으면 읽을수록 구체화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무너지고 해체된다. 이런 난감한 소설이라니. 


   사실 나름의 논리와 의미를 가진 의견이라고 했지만 대체로 이런 식이다. 

   “X여사는 잔뜩 흥분한 상태로 한껏 공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었기에 곁에서 일어나는 일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 그녀는 자신이 상상한 머릿속의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 중이었다.”(44) 


   Q선생은 또 어떤가. 오향거리에 사는 거의 모든 여자들의 욕망의 대상이지만 이 사람 또한 알 수 없다. 어째서 욕망의 대상이 되는지도 알 수 없는 지경이다. 그렇게 읽다 보면 본격적인 이야기가 나온다고 하는데, 그 본격적인 이야기는 우리가 기대하던 서사가 아니다. 오히려 원래 이야기하려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도 잊어버릴 정도로 다양한 인물들의 의견과 ‘필자’의 변이 이어지는데, 이 서술자 또한 자신을 속기사라고 지칭하면서도 사건을 혹은 이야기를 제대로 기록을 하는지도 확신할 수 없다. 그런 식으로 계속 따라가다 보면 작가가 핵심을 말해준다고 친절하게 말한다. 


   “이제 우리는 이야기의 핵심으로 들어가려 한다. 모든 과정을 특정한 양식에 따라 객관적으로 서술하려면…… 아마 누구도 그런 능력은 없을 듯싶다. 전통적 방식은 이미 구식이 되기도 했으니 혁신이 필요하다.”(214)라고 말한 작가가 핵심으로 들어가리라고 기대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전통적 방식”에 따라서 우리에게 이야기를 들려줄 의도가 눈곱만큼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더욱 미궁 속으로 들어가서 쓸데없어 보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줄곧 들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작가가 더욱 친절하게도 “결말에 대한 해설”까지 덧붙여준다. 이렇게 말이다. “여기까지 서술하는 동안 필자는 두서없는 실마리를 수없이 남겨놓았다. 그건 독자들에게 제대로 된 해설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야기가 여기서 끝나지도 않으니, 필자는 이 뒤엉킨 매듭을 깔끔하게 풀고자 한다. 오향거리 사람들은 누구나 이게 끝없이 이어지는 이야기임을 안다. 시작도 없고(앞쪽의 시작은 가정일 뿐이다) 끝도 없다. 이것은 역사의 흐름 자체라서 지구와 태양이 충돌해 세상이 멸망하지 않는 한 끝나지 않는다.”(342)


   이쯤에서 서서히 우리는 작가의 의도 혹은 정체를 눈치채게 된다. 작가는 결코 우리에게 전통적 작가의 역할을 하고 싶은 생각이 없으며, 이 소설은 거대한 하나의 은유, 픽션에 대한 은유이며 현실을 아무 때나 제멋대로 소환해 내는 픽션이다. 그러니까 이곳의 인물은 절대로 형상화될 수 없으며 우리 앞에서 그저 공연하고 있을 뿐이다. 그 공연을 관람하는 우리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때때로 픽션 속의 일부가 된 듯한 환상을 경험할 수도 있고 현실과 픽션의 경계가 무너지는 것 같은 상태를 경험할 수도 있다. 


   마침내 책을 덮었을 때는 오향거리에 다양한 향이 가득한 것 같았지만 무어라 정의할 수 없어서 오히려 향이 소멸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어쩌면 누군가는 오향의 다채로운 맛이 취해있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어느 쪽이든 간에 제멋대로 경험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이 소설을 통해 작가가 기대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이 책의 역자는 이런 해석을 덧붙인다. 


  “모든 사람이 주인공이고 모든 사람이 공연하며 모든 사람이 창작하는 게 바로 소설이라고 말하는 듯하다.”(4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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