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초콜릿책방지기 Jul 29. 2023

<그림의 이면>

클래식한 사랑 이야기

   사랑의 감정이 변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대체로 인정하기 힘들어한다. 인생처럼 사랑의 감정에도 시작과 중간과 끝이 있고 그 시간의 순서에 따라서 감정의 깊이도 달라진다는 걸 알면서도 부정하고 싶어 한다. 사실 사랑을 시작한 사람이 그 사랑의 끝을 예상한다는 것 또한 아이러니한 일이긴 하다. 


   이제 막 사랑에 눈을 뜬 두 사람이 있다. 한 명은 스물두 살의 남자, 한 명은 인생에서 사랑의 감정이 찾아오리라 기대하지 않았던 서른다섯 살 여자다. 성별의 차이와 나이의 차이를 고려하면 두 사람이 보여주는 사랑의 모습은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지만, 인생을 조금 더 살아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사랑에 대한 통찰력은 극복하기 힘든 차이를 보여준다. 


   자기의 사랑을 믿고 싶고 확인하고 싶은 스물두 살의 놉펀은 그 사랑이 변치 않으리라 생각하지만 현실적인 제약을 고려하면서 사랑을 지켜야 하는 끼라띠는 그것이 변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두 인물이 가진 아이러니는 사랑이 변치 않으리라 맹세했던 놉펀의 사랑은 변해버리고, 변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끼라띠의 사랑은 변함없이 지속된다는 점이다. 


    독자의 입장에서 한 걸음 떨어져서 볼 때 둘의 사랑이 이루어질 가능성은 희박하다. 하지만 엇갈린 사랑 이야기는 영원히 변치 않는 문학의 소재가 되는 것이므로 이루어질 가능성이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중요한 것은 두 인물을 통해 말하고 있는 사랑의 속성을, 인생의 단계마다 느끼거나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랑의 본질의 차이를 이 작품에서 잘 그려내고 있다는 점이다. 


    “나는 끼라띠 여사가 그 편지 속에 어떤 심오한 감정을 숨겼음을 전혀 알아차리고 인식하지 못했다. 인생의 세심함과 은밀함이란, 그 당시에 알기에는 나의 이해력을 넘어서는 것이었다.”(135)


    서로의 감정이 운 좋게 만날 수 있는 때는 인생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행운이기도 하지만, 서로가 가진 이해와 통찰력이 때마침 맞닿을 수 있을 때이고, 그 크기가 비슷하게 만나는 그런 순간은 우리가 가진 미숙함과 어리석음, 망설임을 모두 극복한 순간일 것이다. 이 소설의 인물들은 그래도 운이 좋은 편이라고 생각한다. 끼라띠는 그토록 기다리던 사랑을 경험했기 때문이고, 놉펀은 사랑을 아름다운 추억으로(혹은 그림으로) 간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글쓰기 사다리의 세 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