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초콜릿책방지기 Aug 19. 2023

<나 제왕의 생애>

시원시원하게 읽히는 몰락한 왕국의 이야기

   근대 이전의 서사는 개인의 삶이 집단의 운명에 따라서 결정되었기 때문에 집단의 가치를 지키는 영웅의 이야기가 가장 중요한 테마였다. 초인적인 능력으로 당면한 어려움을 해결하고 집단을 지켜주는 영웅은 개인에게도 꼭 필요한 이야기였다. 안온한 일상을 이어가기 위해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을 것이다. 


   하지만 과학 기술과 자본이 그동안의 세계에 지각 변동을 일으키면서 개인들의 요구는 달라졌다. 왕을 비롯한 몇몇 특권 계층이 집단을 공고하게 지켜주기 힘들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전통적인 영웅의 이야기는 설득력을 잃게 되었다. 


   선왕이 서거하고 이제 막 섭국의 왕이 된 단백은 왕의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다. 보통 우리가 기대하기 마련인 왕이라는 인물과 사뭇 거리가 있다. 알고 보니 단백을 왕으로 세운 것도 섭정을 맡은 황보부인이다. 정상적인 경로로 왕이 된 것도 아니고, 비범한 면모를 보여주는 것도 아니다. 우리 중 누구라도 대신할 수 있는 인물, 범속하고 보잘것없는 인물이 왕이라고 한다면 그 인물의 영웅적 활약보다는 내면의 변화가 더 궁금해진다. 


   단백은 황보부인의 꼭두각시로 살아가고 있어서 왕궁 안에서는 행복하지 않다. 자신의 상태를 모르는 채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었던 이유는 폐쇄된 공간-왕궁-안에서 갇혀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에 대한 자각이 이루어지는 순간은, 연랑과 함께 품주성 바깥으로 나가서 곡마단 사내의 눈에 들었던 순간이다. 아마도 평생 처음, 누군가에게 있는 그대로 인정을 받은 순간이었을 것이다. 몸이 날래 보이니 줄타기를 가르쳐주겠다고 하는 그 말은 단백의 운명을 바꾸는 말이었다. 그런 순간이 있었기 때문에 단백은 왕의 자리에 미련을 두지 않는다. 거친 음식과 더러운 잠자리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단백은 영웅의 자리에서 완벽하게 쫓겨난 한 개인이 되었고 우리는 이런 이야기가 더 친숙하다. 섭국이 무너지고 단백의 권력을 가져갔던 이들도 모두 죽어버렸을 때 단백만은 고죽사에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게 된 것, 그 안에서 온전히 자기 자신만의 왕이 된 상태가 가장 현대적인 영웅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제왕의 생애’라는 제목에서부터 근대적 서사를 예측할 수 있었고, 소설은 예상에 맞게 충실하게 따라가고 있다. 사실 그동안 우리가 가장 재밌게 읽어왔던 이야기의 형태이기도 하다. 혜비나 연랑의 이야기가 궁금할 때도 있지만 그들의 내면에 대한 이야기는 조금 더 세련된 형태로 만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아마도 매우 분열된 내면을 갖고 있는 현대인의 모습이겠지만. 


매거진의 이전글 <별의 시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