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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콜릿책방지기 Aug 26. 2023

<어떻게 지내요>

당신의 고통은 무엇인가요 하고 물을 수 있는 용기

   솔직히 말하면 요즘은 타인의 고통에 대해 묻는 것이 실례인 것처럼 느껴진다. 고통은 나누기보다는 혼자서 오롯이 감수하는 것이 올바른 것이라는 사회적 기준이 이미 내면화된 모양이다. 누군가 자신의 고통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먼저 뒤로 물러서게 된다. 


   소설 속 암에 걸린 친구가 암환자들이 고통에 직면하는 것을 막는 모든 상황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는 가장 큰 이유는 진실을 회피하기 때문이다. 그 환자들이 느끼는 것을 그대로 인정하기보다는 이겨낼 수 있다고 허황된 희망을 말하고 있는 것은 고통이라는 진실에 대한 회피이기도 하다. 어차피 고통을 느끼는 당사자가 아닌 이상 고통에 대해 더 말하기보다는 극복할 대상처럼 만들어서 치워버리는 게 마음 편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을 함께 해달라는 친구의 요청을 거절하지 않은 ‘나’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과연 어떤 것인지 보여준다. 고통의 시간을 함께 해준다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라는 걸, 친구가 원하는 것을 말없이 알아차리는 순간들을 지내면서 결국 공원에 혼자 앉아서 울음을 주체하지 못하는 ‘나’의 모습을 보면서 알게 된다. 사랑을 한다는 것은 함께 있는 순간 편안하고 행복한 것도 있지만 그 사람 때문에 감정의 밑바닥까지 가닿는 것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그렇게 ‘나’처럼 고통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버림받았던 고양이의 이야기도 들리고, 하루 종일 혼자 집에 있는 할머니의 “말하지 않은/말할 수 없는 고통”도 보게 된다. 어쩌면 고통에 대해 질문하는 것 자체가 감당하기 어려운 것을 감히 건드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나’는 계속 나아간다. ‘나’의 전 남자 친구인 강사는 기후위기에 대해 경고하면서 인간은 결국 파멸을 향해 가고 있다고 말만 하지만, ‘나’는 보이지 않는 듯 보이는 중요한 일들을 실행한다. 그것만이 우리가 견딜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길이기 때문에. 


    “세상에는 두 종류의 인간이 있다고 했다. 고통받는 사람을 보면서 내게도 저런 일이 일어날 수 있어, 생각하는 사람과 내게는 절대 저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야, 생각하는 사람. 첫 번째 유형의 사람들 덕분에 우리는 견디며 살고, 두 번째 유형의 사람들은 삶을 지옥으로 만든다.”(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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