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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콜릿책방지기 Sep 23. 2023

<남편의 아름다움>

아름다움에 사로잡혀 본 적이 있다면 추천합니다

   이 책은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인가, 사랑에 대한 아름다움인가. 의문으로 시작해서 질문으로 끝나는 책이다. 


   주인공은 남편의 치명적인 아름다움 때문에 사랑에 빠졌다고 한다. 어쩌면 이 대목에서부터 읽기를 포기하는 사람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실험적인 작품은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그를 사랑했느냐고? 아름다움 때문이었다. 그건 비밀이랄 것도 없다. 나는 아름다움 때문에 그를 사랑했다고 말하는 것이 부끄럽지 않다. 그가 가까이 온다면 다시 그를 사랑하게 될 것이다. 아름다움은 확신을 준다.”(12)

   여기까지 읽으면 예술은 감각기관을 즐겁게 해 주기 위한 것이지 그 너머의 것을 열망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 유미주의자들의 주장을 되풀이하는 것인지 궁금해진다. 그 너머의 것을 열망하는 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지고의 예술적 가치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미적 가치에만 한정하는 열망은 선뜻 동의하기가 어려워서 갸우뚱하며 읽기 시작한다.   

   그런데 작가가 말하는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남편이 가진 아름다움의 실체를 알 수가 없다. 그것이 단지 감각기관을 즐겁게 해주는 미적인 아름다움인지, 존재 자체가 뿜어내는 아우라를 포함한 아름다움인지, 혹은 지적인 면을 드러내주는 재치를 겸한 아름다움인지 모호하기 때문이다. 그저 작가가 말하고 있는 아름다움이 한 사람의 일생을 바꿔놓을 정도로, 시간이 흐른 뒤 또다시 그런 순간이 와도 똑같은 선택을 하겠다는 정도의 아름다움으로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인간으로 남는다는 건 한계를 깨는 것이다. 좋아할 수 있으면 좋아하라. 그럴 용기가 있다면 좋아하라.”(22)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것은 인간적 한계를 깨는 일이며 신의 영역에 대한 사랑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면, 아름다움에 대해 가지고 있던 한정된 감각이 깨지게 된다. 말과 사물의 의미를 연결하는 것마저 깨뜨리는, 신처럼 마음대로 의미를 변형시키는 남편, 그의 거짓말은 이렇게 아내에 의해 의미가 바뀌어버린다. 이제 아름다움은 우리의 한계를 넘어선 영역을 넘본다. 


   그런데 아내의 입장에서는 아름다운 남편을 선택한 것이 자의적이라기보다는 “존재의 음모에 의해” “모험에 내몰린” 것이라고 한다. 아름다움에 사로잡히는 사랑이란 이런 것이다. “존재는 아름다움에 이를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고 그다음엔 종말로 이어지는 모든 결과들이 뒤따를 것이다.”(68) 그 사랑은 죽음까지 뛰어넘을 수 있는 것이므로 아름다움은 이제 극도로 높은 위치에 자리한다. 그 이상은 없다. 


   하지만 사랑이라는 것은 사로잡힌 순간만 기쁨을 느낄 뿐, 대부분의 순간은 불안과 질투, 두려움과 분노로 대체된다. “허구는 우리 안에서 흐르는 것을 형성한다. 당연히 그건 의심이다.”(103)


   작가는 키츠를 비롯해서, 우리가 아는 어떤 작가들을 떠올릴 수 있을만한 일화들을 집어넣어서 비틀어 사용한다. 그리고 그 허구의 의심, 아름다움에 대한 흔들림, 사랑의 불확실성이 존재를 흔든다. 흔들리는 존재는 아름다움과 결별하는 것을 택한다. 하지만 여전히 변치 않는 가치로 남아있는 것은 결국 한때 사로잡혔던 그 아름다움이라는 깨달음이다.


   “아름다움은 진리라고 말하고 멈추는 것. 그걸 먹기보다는. 그걸 먹고 싶어 하기보다는. 이것이 내가 처음에 품었던 순수한 생각이었다. 나는 한 가지를 간과했다. 아름다움을 접하게 되면 그것이 우선하게 될 것임을-내 심장 속에서. 이미 먹혀버린. 목적의식과 신전들과 신이 있는 바깥이 아니라. 안에서. 그곳에서 그는 이미 나였다. 나의 상태였다.”(188)   


   책을 덮으며 우리는 이 책의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작가의 의도였다는 걸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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