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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콜릿책방지기 Nov 04. 2023

<점원>

책방지기의 내면을 보여주는 것 같은 식료품점 아저씨

   우리가 생각하는 전형적인 유대인의 모습은 문화적 폐쇄성이 강한 민족이고, 타협을 할 줄 모른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의 주인공인 모리스의 모습은 사뭇 다르게 보인다. 모리스가 이탈리아 사람인 프랭크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감싸는 모습을 보면 유대인이라는 민족성에 앞서, 인간적인 공감이 더 크게 작용한 듯하다. 아내인 이다가 계속 경고하고 있음에도 프랭크를 받아들인 이유는 무엇일까.


   모리스가 처한 한계가 가장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평생을 감옥처럼 붙들려 있던 식료품점이 이미 희망이 없고 끝도 없는 바닥을 향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리스 스스로는 어쩌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프랭크는 구원자로 나타난 인물이다. 강도를 당해서 누워있었다고는 하나, 그것은 이미 짙어진 절망에 약간의 비극을 더한 것뿐이다. 그래서 프랭크가 식료품점에서 일을 시작하자, 쉽게 마음을 열고 의지하게 된 것이다. 그러고 나서는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믿고 싶은 대로 믿는다. 프랭크 덕분에 가게가 잘 되는 것이라고. 


   주변에서 아무리 제대로 된 충고를 해줘도 듣지 않는 모리스의 모습은 그가 그런 인생을 살게 된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알게 해 준다.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도 모든 선택이 안 좋은 길로만 향하는 인생을 볼 때가 있다. 그런데 문제는 모리스가 악의를 가진 인물이 아니라 오히려 선량한 쪽에 가깝다는 사실이다. 그 사실이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자기보다 못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끊임없이 살펴주는 모리스 같은 인물이, 단지 고집스럽게 잘못된 선택을 해서 무너지는 걸 보고 있는 건 신의 뜻이 정의로운 쪽으로 작용하는 게 아니라 신의 마음에 들어야 한다는 쪽으로 작용하는 것 같아서 말이다. 사실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모리스는 유대인의 규율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 날라리 유대인이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의 신이 모리스를 아낄 리가 없다. 


   이다가 그토록 걱정하던 일, 헬렌이 프랭크와 사귀고 있다는 사실을 모리스에게 말을 했을 때도 모리스는 바로 프랭크를 내보내지 않는다. 유대인은 유대인과 결혼해야 한다는 규율조차 모리스에게는 그리 강력하게 작용하지 않는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프랭크는 모리스에게 다시 와서 비빌 수 있는 것이다. 소설에서는 프랭크가 가지고 있는 내면의 갈등, 도덕적 삶에 대한 갈등을 주로 보여주는데, 이것은 모리스의 내면과도 중첩되는 느낌이다. 끝없이 카프를 질투하고 저주하면서도 막상 얼굴을 보면 친절하게 대할 수밖에 없는 그 이중적인 모습을 보면, 모리스와 프랭크는 비슷한 점이 많다. 덕분에 프랭크가 강도질로 시작한 가게에서 할례를 받고 유대인으로 되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닐까.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서 미국에서 유대인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말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태생이 유대인이지만 적당히 타협하면서 지내고 있는 모리스, 그런 모리스를 통해 유대인에 대해 배우고 유대인이 되는 프랭크와 같은 인물들이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잘 섞여 들어서 살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게 아닐까 싶다. 모리스와 프랭크의 너무나 인간적인 내면의 갈등을 들여다보다 보면 유대인이건 이탈이아인이건 한국인이건 다 비슷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면서 미국 문학은 세계 문학으로 또 한 번 확장되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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