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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콜릿책방지기 Nov 18. 2023

<인센디어리스>

광신도가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윌을 통해서 이 이야기를 읽게 된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윌에게 감정을 싣게 된다. 윌이 사랑하는 피비, 윌이 경계하는 존 릴, 윌이 바라보는 세상을 보며 판단한다. 피비의 내면도 윌을 통해서 알게 되는 것인데 어찌나 피비의 입장을 잘 헤아리고 있는지, 정말 피비가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조금씩 의아함이 생기는 게 이상하다. 윌은 어떤 힘든 순간이나 위기의 순간마다 착란 증세를 보이는데, 그가 보는 굴절된 세계가 등장할 때마다 윌이라는 서술자를 신뢰할 수 있는지 알 수가 없게 된다. 그러면서 조금씩 균열이 생긴다. 서술자와 독자 간에 거리가 생기고 서술자이자 주인공인 윌에 대한 신뢰에 금이 간다. 그런 의심 혹은 균열이 생겨나는 시점은 독자마다 다를 것이다. 눈치 빠른 독자는 빨리 알아챌 것이고, 조금 무디거나 윌에게 마음을 온통 쏟아부었던 독자는 아주 나중에서야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사랑에 빠진 적도 있고, 종교에 의탁했던 적도 있을 것이라서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 이 사랑이 혹은 이 종교가 진짜인지 거짓인지, 진실한지 아닌지,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떠나는 시점이 언제일지에 대해 각자가 가지고 있는 고민들이 있다.


   윌에 대한 마음도 비슷하다. 언제 거리를 둬야 할지 가늠하는 시점이 다 다르다. 작가는 영민하게도 윌과 종교의 속성을 일치시켜서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인지 윌을 만난 피비가 결국 그런 결말을 맞을 수밖에 없는 것이 더 납득이 된다. 윌은 피비의 결핍을 결코 채워줄 수 없다. 윌의 일방적이고 폭력적인 면 또한 종교의 어떤 면과 맞닿아있다. 그래서 윌과 존 릴이 별로 다르게 느껴지지 않는다. 윌의 착란처럼 독자가 착란을 일으키면 윌이 존 릴의 페르소나처럼 보일 때도 있다. 


   사실 종교에 관한 이야기는 참 쓰기 어렵다. 정치적인 주제와 마찬가지로 첨예하게 대립할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어딘가에 맹목성이 도사리고 있는 주제들은 말하는 순간 마이너스가 되기 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하고 있는 것, 조금 더 참신한 방식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 이 작품의 매력이다. 제목처럼 마음이 불 질러지지는 않아도 한 번쯤 시간 내어 읽을 만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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