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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콜릿책방지기 Dec 02. 2023

<연기 인간>

연기 인간은 어쩌면 사랑일지도 몰라요

   누구라도 황금을 바치기만 하면 왕이 될 수 있는 나라가 있다. 왕이 급사하고 급사의 원인이 되는 범인이 있어도 다음 왕은 그 범인을 처벌하지 않는 나라이기도하다. 도시를 대표하는 귀족들도 본분을 내팽개친 곳이다. 국가 체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배금주의 세상에서 군중들의 욕망을 가려져 있다. 하지만 독자는 그들의 삶이 비참할 것이고 지금과는 다른 세계를 욕망할 수도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어느 날 홀연히 나타난 페렐라는 평범하게 태어난 존재가 아니다. 페나(고통), 레테(그물), 라마(창)이라는 세 노파가 불을 피우던 굴뚝에서 33년 만에 태어난 존재다. 


   페렐라는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예수가 죽은 나이와 똑같은 나이에 검은 자궁에서 태어났다. 마치 예수처럼 새로운 가치와 법을 세우기 위해 페렐라는 새로운 법전을 만들려고 한다. 법전을 만든다는 행위가 페렐라의 의지에 의한 것인지는 아닌지는 여기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세계를 바꾸는 것, 전복시키는 것이 더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페렐라가 연기에 불과한 존재이긴 하지만 군중들은 자신들과는 다른 이 존재에게 희망을 건다. 그들의 왕은 이바처럼 똥통에서 뒹굴며 술만 마시면 되는 존재에 불과하기 때문에 연기와 같은 희망이라도 희망이라면 충분할 것이다. 


    사실 페렐라라는 존재는 연기처럼 가벼운 존재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전복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지만 사람들이 해석하는 페렐라의 의미는 제각각이다. 페렐라는 항상 가벼움을 이야기하지만 사람들은 전혀 알아듣지 못하거나 다른 방식으로 해석한다. 문제는 페렐라처럼 되고 싶었던 알로로가 스스로를 불태워버렸는데, 그걸 본 페렐라가 가벼워지고 싶었던 것이라고 말한 것에서 시작된다. 페렐라는 그동안 그의 본질과 동일하고 일관성 있게 가벼움을 말한 것이었는데 그것이 이제는 민중의 분노를 불러일으킨 것이다.  


    페렐라의 가벼움은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는데, 해석자의 태도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대중은 생명을 가볍게 여긴다고 생각했지만 페렐라가 의도한 가벼움은 그동안 무거웠던 세계에서 떨쳐낼 것이 많은, 자유롭고 싶은 가벼움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해석의 차이는 치명적이라서, 페렐라는 죄인의 위치로 떨어진다. 사실 대중에게는 영웅과 죄인이 동전의 앞뒷면이나 마찬가지다. 그들에게 확실한 대안과 혁명적 변화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그때 필요한 것은 희생양일 뿐이다. 


   마치 예수가 살았던 삶을 똑같이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페렐라가 가져온 결말은 동일하지 않다. 이 세계를 대속하기 위한 존재처럼 보였지만 연기로 왔다가 연기처럼 사라진 페렐라가 대속의 의미를 이뤘는지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작가는 당대 유럽 정신의 바탕이었던 기독교적 내용을 가져와서 흔들고 비틀고 변형시켜서 독자의 사고를 전복시킨다. 그런 시도를 통해서 독자는 기존 세계의 가치관과 결별하는 계기를 마련할 수도 있고, 새로운 세계를 꿈꿀 수도 있을 것이다. 문학이 끝없는 시도하는 갱신의 몸부림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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