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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콜릿책방지기 Dec 04. 2023

<불안의 서>

외로운 영혼들을 모두 떠올리게 하는 책

   시인들은 세상을 설명하는 방식이 다르다. 언어가 가진 한계를 절감하기 때문에 대상에 대해서 직접 설명하려고 하지 않는다. 은유적 세상 안에서 자기 인식의 틀 또한 다를 것이며, 그것을 나타내는 방식도 다를 것이다. 감각하는 정도와 크기 또한 다를 수 있다. 그것을 설명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우리는 은유로 말하고 상징으로 설명하는 시인들의 방식 덕분에 우리의 인식을 조금 더 확장할 수 있고 타자의 세계에 대해 너그러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시인의 영혼을 가진 작가 페소아의 페르소나인 수아레스는 보조회계원이다. 사무실에서 수아레스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은 아마 그의 영혼이 항상 떨리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아채지 못할 것이다. 그건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수아레스가 보고 있는 타자들, 바스케스 사장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이 두르고 있는 외피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수아레스도 알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수아레스는 섣불리 관계를 맺으려고 하지도 않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살고 있다. 자기 내면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만으로도 벅찬 데다 자신처럼 평범해 보이는 타인들의 내면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을지도 짐작할 엄두가 나지 않을 것이다. 타자와의 거리를 좁히기 위한 시도를 하는 것은 수아레스에게 정말 어려운 일인데, 세계와 내가 불화하지는 않더라도 세계 안에 있는 자신의 의미를 스스로도 정리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아레스는 대부분의 시간을 철저히 혼자 자신의 내부로 침잠해서 그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설명하려고 애쓴다. 


   그는 글쓰기를 통해서 자신을 규명하고, 자기 존재를 보여주고 싶은 욕망도 있지만 그조차 확고하지 못하다. 수아레스가 페소아의 여러 페르소나 중 하나인 것처럼 수아레스도 분열되어 있기 때문이다. 분열된 글은 하나로 모아지지 않고 계속 흩어진다. 흩어져서 그 순간순간만 존재한다. 글쓰기의 시작과 끝이 있는 것은 분명히 하나의 완결이 있고, 통합을 향해 가는 것이지만 수아레스는 그런 글쓰기를 하지 못한다. 분열된 글쓰기 자체가 수아레스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불안의 서>의 모든 글은 순간을 위한 글, 그 하나하나가 에피파니에 종사하는 글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당연히 서사도 필요하지 않고 하나의 일관된 의미도 요구하지 않는다. 시인이 세상을 설명하듯, 그 언어로 순간순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순간에 수아레스 혹은 페소아와 맞닿을 수 있는 것은 독자에게 달린 문제다. 에피파니의 순간은 항상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백석이 말한 것처럼 가만히 흰 바람벽을 바라봐야 하는 시간일지도 모른다. 그럼 그곳에 수아레스가 본 것과 비슷한 것들,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한 어떤 것들이 현현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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