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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콜릿책방지기 Dec 09. 2023

<우체국 아가씨>

그때의 우체국 아가씨가 지금은 평범한 소시민의 모습일지도

   작은 시골 마을 우체국에서 근무하는 여자가 있다. 여자에게 주어진 환경은 가난이고, 미래는 근근이 하루하루를 살아가야만 하는 삶이다. 여자가 돌보고 있던 아픈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면 여자에게 주어질 선택지는 “남이 알아주지도 않는 보잘것없는” 취미로 식물표본집을 만들거나 필사를 하며 살고 있는 학교 선생 프란츠 푹스탈러 씨와 결혼을 하거나, 혼자 박봉의 월급으로 살아가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런 현실밖에 알지 못하고 사는 이 여자, 크리스티네는 돈 많은 클라라 이모가 함께 휴가를 보내자고 초대했을 때 먼저 두려움과 불길한 예감을 느낀다. 사실 그 예감은 대체로 틀리지 않아서, 독자인 우리는 이 예감을 소설의 복선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노동과 가난에 찌들어 살던 크리스티네는 처음 호텔에 도착했을 때만 잠깐 당혹스러움을 느꼈을 뿐, 새 옷으로 갈아입자마자 이내 상류층들의 삶으로 녹아들어 간다. 마치 오래전부터 꿈꿔왔던 것을 단숨에 이룬 것처럼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자신의 이름도 아무 거리낌 없이 바꾸면서. 

   현실에 안주하며 범속하게 살아가는 인간은 크리스티네의 행동과 욕망을 이해하기 힘들다. 보바리 부인과 같은 인물을 볼 때 깊이 이해하는 쪽과 결코 이해하지 못하는 쪽으로 날카롭게 나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리고 욕망의 정도를 떠나서 크리스티네에게 주어진 환경은 보바리 부인의 것보다 훨씬 견디기 힘든 상황이다. 크리스티네가 처한 상황은 츠바이크가 경험한 세계 대전 이후의 유럽의 상황에 대한 은유처럼 보이는데, 인간이 이뤄놓은 정신적 물질적 풍요로움이 모두 파괴된 세계에서 과연 우리는 얼마나 견디며 살 수 있을까. 생존의 문제가 목숨을 연명하는 것이라면 상관없겠지만, 그보다 더 존엄한 무언가를 바라는 인간성에 관한 문제라면 하루도 살기가 힘들 것이다. 


   상류층의 생활을 맛보지 않았다면 크리스티네는 죽은 듯 가난한 삶을 견디며 살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다른 세계를 알게 된 이상, 자신의 현실을 견뎌낼 힘은 남아있지 않게 된다. 그것은 이미 다른 삶을 알고 있다가 박탈당한 페르디난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전쟁이 모든 것을 앗아가고 아무런 희망도 남기지 않았을 때 두 사람이 할 수 있는 선택은 자의적으로 만든 존엄한 죽음 아니면 탈주만 남아있을 뿐이다. 


   당시의 우체국은 전 세계와 순식간에 연결될 수 있는 유일한 창구였을 텐데, 그 안에 갇혀 있던 크리스티네에게는 그 모든 가능성이 전혀 보이지 않던 가난하고 유폐된 삶의 장소였을 뿐이다. 그런 장소를 희망의 가능성으로 보게 되는 것은 전혀 다른 의미로 시작되었을 때나 가능하다는 것은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소설적으로 아주 잘 짜인 구성에다 문제적인 인물, 시대를 초월해서 관통하는 주제 의식, 전쟁 전후의 배경의 모든 흥행요소에도 불구하고, 츠바이크라는 작가가 발자크의 전기 작가로 먼저 떠오르는 이유는 더 알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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