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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콜릿책방지기 Dec 16. 2023

<귀나팔>

상징과 의미의 향연

   아흔두 살의 메리언 레더비의 모험 이야기는 여성 전용 양로원에 들어가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사실 우리는 백 살에 가까운 나이에 모험을 시작하는 이야기는 별로 본 적이 없다. 특히나 나이 든 여자가 주인공이 되어 시작하는 모험 이야기는 쉽게 떠올리기 어렵다. 그래서 일단 주인공의 나이와 성별, 모험 자체부터 낯설다. 


   어쩌면 이 소설을 모험 이야기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세계의 구원을 위해 성배를 찾아가는 메리언의 시도는 모험 이야기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성배를 찾는 이야기는 모험 이야기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메리언은 아흔두 살이 되어도 “기적에, 마녀에, 동화에” 사로잡혀있는 철들지 못한 여인이다. 귀가 잘 들리지 않는 탓에 혼자 공상하는 것을 즐긴다. 그런 메리언이 집에서 쫓겨나서 양로원에 들어가게 되자, 친구인 카르멜라가 귀나팔을 선물한다. 낯선 현실에서 살아남으려면 아무래도 필요할 것 같다고 생각한 현실적 친구가 준 요긴한 선물인 셈이다. 귀나팔 덕에 메리언은 양로원을 운영하는 갬비트 박사 부부의 욕심을 알아차릴 수 있었고, 나타샤와 반 토흐트 여사의 악랄한 계획도 들을 수 있었다. 


   카르멜라의 도움으로 양로원에서 나타샤와 반 토흐트 여사를 내보내고 난 뒤에도 이상한 일이 계속 벌어진다. 지구가 기울어지는 바람에 빙하기에 들어선 것이다. 세계는 빙하기라는 재앙으로 인해 무너지고 양로원에 있는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서로 힘을 합친다. 그들에게 나타난 우체부와 말보로, 아누베스 덕분에 성배를 되찾고, 메리언의 이상향이었던 라플란드에 도달한다. 


   모험 이야기만 나열하고 나면 이 소설은 정말 이상한 이야기다. 나이 든 사람의 몽상을 풀어놓은 이야기처럼 보여서 어떻게 읽어야 할지 당혹스럽다. 하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이 소설은 전형적인 로망스의 형식을 따르고 있는 완결된 형식의 소설이다. 성배를 찾아가는 기사 대신 아흔두 살의 메리언이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여성 서사로 다시 쓰인 <아서왕 이야기>인 셈이다. 아마 성배 이야기를 비롯한 서구 신화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이 소설의 내용이 그리 낯설지 않을 것이다. 


   기존 텍스트에 대한 전복과 비틀기, 변주가 남부럽지 않게 담겨 있고, 그것들을 찾아내는 재미가 있는 소설이기도 하다. 젊은 남자 기사가 주인공이 아니라 나이 든 여자가 주인공인 점, 중국인 운전사가 등장하는 것으로 봐서 인종적 한계를 뛰어넘는 점, 새로운 세계를 구성하는 중심 종족이 인간이 아닌 점, 노아의 방주를 비롯한 성경의 이야기를 비트는 점, 수녀원장의 모습을 한계 너머로 밀어붙이는 점, 전복된 세계는 혼종의 세계로 보여주는 점 등등이 굉장히 흥미로운 점들이다.  


    게다가 어쩐지 귀나팔은 성배의 모양을 떠올리게 하는데, 성배는 여성성의 상징이며 (“창은 남성의, 잔은 여성의 재생 능력을 나타낸다.”(J.웨스턴, <제식으로부터 로망스로>, p.89)) 그걸 한 단계 더 나아가서 메리언의 귀나팔로 변형한 것은 정말 재밌는 발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메리언은 이미 친구가 선물한 귀나팔이라는 성배를 갖고 있었던 셈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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