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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콜릿책방지기 Dec 20. 2023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9>

마르셀이 가둔 여인의 실체는 무엇일까요

   “사랑의 호기심은 고장의 이름이 마음속에 불러일으키는 호기심 못지않게 늘 환멸적이며, 다시 나타나도 늘 충족되지 않는다.”(235)


   마르셀은 이제 안다. 사랑의 속성에 대해 알고 있고 그 사실을 외면하지 않는다. 알면서도 뛰어든다. 충족되지 않으니 계속 욕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도 알고, 환멸에 이를 수밖에 없다는 것도 알지만, 환멸을 피하기보다는 그곳에 이르는 과정을 오히려 더 자세히 파고들어 간다. 


   사랑을 하면서 발생하는 감정들은 호기심과 환희를 비롯한 긍정적인 감정도 있지만 우리가 외면하고 싶은 부끄러움, 치졸함, 질투, 집착 등의 감정들도 수반하는데, 그것들을 모두 아주 세심하게 들여다본다. 그 감정들의 원인을 들여다보고 설명하다 보면 사랑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사랑이라는 게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복합적 감정을 모두 포함하고 있으면서도 이상적 허상에 가까운 감정이라는 걸 확인하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들여다보고 나면 사랑뿐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도 알게 되고 그러고 나면 자신과 더 맞는 사랑을 찾게 되리라 생각했을 수도 있다. 


   언제나 병약한 마르셀은 마치 사그라드는 것처럼 보이는 몸의 상태와는 다르게 사랑하는 마음은 항상 불타오른다. 마음을 몸이 감당할 수 있을까 싶은 정도로 사랑에 투신하는 마르셀이 애처롭게 보이는 이유는 대상이 항상 어긋나기 때문이다. 질베르트를 향한 사랑과 게르망트 부인을 향한 연모가 이제는 알베르틴을 향하고 있는데, 그 사랑의 모습이 갈수록 비극에 가까워지는 것 같다. 


   마르셀은 알베르틴을 자기 집에 데려다 두고 함께 살기 시작하는데, 그 이유가 온전히 사랑 때문이 아니라 고모라적 정체성으로부터 멀어지도록 만들기 위해서다. 알베르틴을 향한 마르셀의 마음은 수시로 변하고 끊임없이 의심으로 가득 차서, 그녀를 감시하면서 일거수일투족을 알아야 마음이 놓인다. 그렇게 알베르틴을 가둬두는데, 갇힌 여인보다 더 괴로운 사람이 마르셀이다. 마르셀은 알베르틴을 가두고 나서 자기 마음의 감옥에 갇힌 것처럼 보인다. 


   마르셀의 사랑은 악순환이다. 질투로 사랑을 절망적으로 팽창시키다가 그녀의 다정한 거짓말에 치유되고, 치유되고 나면 질투의 원인 제공자에게 고마워한다. 그러다 다시 또 질투의 악순환이 시작된다. 마르셀에게 사랑의 근원은 질투에서 비롯된 것이라서 질투가 없이는 사랑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질투가 있어야만 사랑을 이어갈 수 있다. 


    “그런데 나는 이 작품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질투가 사랑을 얼마나 배가하는지 보여 줄 기회가 여러 번 있었고, 또 앞으로도 그럴 테지만, 그 일은 항상 나의 입장이었던 연인의 관점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런 연인에게도 얼마간의 자존심이 있다면, 비록 사랑하는 여인과의 결별로 인해 죽음에 이른다 할지라도, 배신으로 추측되는 행위에는 결코 친절로 답하지 않을 것이며, 물러가거나 혹은 멀어지지 않아도 스스로에게 무관심을 가장하도록 명할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인이 그를 괴롭히는 건 헛된 일로, 시간만 낭비하게 되리라. 이와 반대로 애인이 능란한 말솜씨와 다정한 애무로 그를 괴롭히는 온갖 의혹을 불식시킨다면, 그는 아마도 질투가 사랑을 고조시키는 그런 절망적인 사랑의 팽창을 더 이상 체험하지 못할 것이며, 오히려 갑자기 괴로워하기를 멈추고, 행복하고 감동하고, 마치 소나기가 내리다 멈춘 후 커다란 마로니에 나무 아래 매달린 물방울들이 이미 다시 나타난 햇볕에 채색되면서 방울방울 긴 간격을 두고 떨어질 때처럼 마음이 느긋해져서 자신을 낫게 해 준 애인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싶어 어쩔 줄 몰라 할 것이다. 알베르틴은 내가 그녀의 친절에 보답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이것이 어쩌면 그녀가 왜 자연스러운 고백으로 자신을 결백하게 하려고 이야기를 지어냈는지, 또 내가 생각조차 해 보지 못한 이야기, 그중 하나가 이미 사망한 베르고트와의 만남 같은 이야기를 지어냈는지를 설명해 줄 것이다.”(317)


   그렇다면 마르셀의 사랑이 이런 형태로밖에 나타날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일까. 마르셀이 보는 알베르틴은 고모라적 사랑까지 가능한 자유로운 사람이고, 이상적 형태의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알베르틴과 육체적 교감을 나누면서 그 쾌감을 어머니에게 받던 키스와 대응시키는 것을 보면 아직 구순기적 형태의 사랑에 머물러있는 것처럼 보이는 마르셀은, 알베르틴을 가둬두면 소유할 수 있다고 믿는 단계에 있다. 마치 어린아이가 엄마를 문밖에 나가지 못하게 문을 가로막고 있으면 엄마를 소유한다고 믿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사랑의 대상이 알베르틴이라서 마르셀의 사랑은 영원히 충족될 수 없다. 그러나 알베르틴은 마르셀에게 다정하기 때문에 마르셀의 사랑은 혼란스러운 것이다. 


   마르셀이 알베르틴에게 자기 사랑을 투사하지 않고 알베르틴 자체를 사랑하거나, 알베르틴에게서 확인되지 않은 고모라적 정체성이 그토록 마르셀에게 영향을 주고 있는 이유에 대해 알게 된다면 마르셀의 사랑은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마르셀에게 다음 단계의 사랑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그에게는 사랑이 글쓰기에 영감을 주는 대상이 아니라 그 자체로 큰 의미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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