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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콜릿책방지기 Dec 30. 2023

<마지막 이야기들>

한 번만 읽을 수는 없는 단편들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깨달음을 주는 문장이 있다. 분명 아포리즘과 같은 문장들을 쉽게 떠올리게 되지만, 단순한 문장이 이어진 곳에서도 그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곳이 있다. 작가가 설명을 최대한 배제하고 보여주는 곳, 단편소설의 세계가 그런 곳이다. 작가는 순간의 장면으로 깊은 진실과 의미를 보여주는데, 그 의미를 찾아내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그래서 단편소설은 더 오랜 시간 공들여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소설집은 한 번만 읽었을 때도 머리와 가슴속에 둔탁한 충격이 오는데, 그 의미를 다 깨닫지 못한 순간조차도 충격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이 놀라웠다. 두 번째 읽기 시작하면 비로소 작가의 의도까지 음미할 수 있다. 첫 문장부터 정교하게 심어놓은 작가의 의도가 보인다. 사후에 출간된 이 소설집은 작가가 갖고 있던 삶에 대한 태도를 좀 더 확실히 보여주는 게 아닐까 싶다. 단편들 하나하나가 모두 다른 이야기지만, 관통하는 주제는 하나로 연결되는 것처럼 보인다. 


   인물들과 항상 일정한 거리를 두고 담백하게 보여주고 있지만 작가가 전달하는 메시지는 따뜻하다. 삶은 어떤 형태로 살든 회한이 남게 마련인데, 모든 형태의 삶에 대해 재단하는 시선이 없어서 오히려 더 그렇게 느껴지는 듯하다. 


   심지어 극소량의 정보로만 보여주는 <모르는 여자>의 에밀리 반스조차도 해리엇의 시선으로 보여주기 때문에 인간적으로 보인다. “실패한 관계에서 구제된” 해리엇이 보기에 에밀리 반스의 모습은 어쩌면 어떤 순간의 선택에 의해서 자신의 모습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런 걸 전혀 알 수 없는 스티븐은 에밀리 반스의 삶을 “살 가치가 없었던 삶”으로 보고 있지만, 그런 태도가 세상을 좀 더 잘못된 방향으로 만든다는 걸 해리엇은 감지하고 있다. 


   우리가 어찌하지 못하는 어떤 우연에 의해 결정되는 것처럼 보이는 삶이, 그 우연을 납득하지 못하거나 타인의 의도로 인한 결과라고 생각하게 되면 불행해지게 마련이지만 쉽게 믿고 받아들이는 미스 나이팅게일과 같은 인물은 오히려 금방 균형을 찾게 된다. 


   인간의 나약함은 갑자기 찾아오는 사랑이나 불시에 떠나가는 사랑에 대해 매우 취약하다는 것을 <다리아 카페에서>와 <대화를 이어가기 위해>, <겨울의 목가>에서 잘 보여주고 있는데, 작가는 그 갑작스러운 감정이 어떤 우연에 가까운 결과이지 의도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감정 변화의 결과로 인해 상처를 받을 수는 있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일부라고 말하는 것 같다.


   <다리아 카페에서>에서는 남편과 바람이 난 소꿉친구인 클레어를 용서하지 못했던 애니타의 쓸쓸한 모습을 통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클레어가 쓸쓸한 고독 속에 고이 간직하고 있는 것, 그걸 애니타는 지금 뒤늦게 쓸쓸한 고독 속에 받아들인다. 사랑이 오기 전, 우정이 더 나은 것이었을 때 있었던 모든 것을.” 

   그리고 <대화를 이어가기 위해>에서는 남편을 찾기 위해 온 비니콤 부인의 이야기를 들으며 올리비아는 자신의 아팠던 사랑을 떠올리고, 자신이 사랑이라고 믿었던 상대의 행동이 그저 대화를 이어가기 위한 친절한 행위였다는 걸 깨닫게 된다. 그래서 비니콤도 정신을 차렸으리라 믿는 것이다. 

   <겨울의 목가>에서 메리 벨라는 자신의 사랑이 변치 않으리라는 걸 알지만 버려진 사람들을 위해서 보내주는데, 그건 그녀의 용기 덕분이다. 


   용기가 있든 없든, 우리에게 벌어진 그 일들에 대해 우리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고 뚜렷한 해결책은 없다. 그 사실을 깨닫는 것, 소설이 아무리 극적이라고 하더라고, 극적인 해결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는 게 현대 단편소설의 백미라고 생각하는데, 윌리엄 트레버는 그걸 아주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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