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이 말하고 있는 것보다 더 큰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소설
요즘같이 햇살이 적당히 따스하고 나른한 봄날, 이제 곧 하늘하늘 날아다니는 나비를 볼 수 있는 이런 때에 멍하니 앉아있다 보면, 내가 나인지, 혹은 다른 존재가 나라고 느끼는 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 있다. 꿈과 현실, 죽음과 삶이 구별되지 않는 물아일체의 경지를 경험하는 호접몽과 같은 깨달음의 순간까지는 아니더라도, 실존에 관한 질문이 떠오르는 순간이 올 때가 있다.
그런 순간은 나와 타자의 구분이 모호한 순간이기도 하지만, 나 자신의 시간이 분절되어 각각의 시간 속에 있던 내가 동일한 인간인지에 대한 구분도 어려워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런 질문의 순간을 확장해나가다 보면 페터 슈탐의 <세상의 다정스러운 무관심>에 이르게 되지 않을까 싶다.
제목에서부터 보여주는 모순어법은, 인생이 모순된 것들의 연속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닐까 예상하게 된다. 여지없이 소설의 내용은 독자에게 의구심을 자아낸다. 화자인 크리스토프가 주장하는 도플갱어의 존재가 확실한지, 도플갱어라고 하는 크리스의 운명은 화자와 동일한 경로를 밟는 것인지, 막달레나와 레나는 일치하는 인물인지 등등 질문을 하다 보면 소설의 내용이 오류투성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생이 모순이라는 것을 알려주려고 오류투성이의 글을 보여주는 작가라니, 참 엉뚱하기도 하다. 소설 안에서 화자가 말하는 모든 것이 상상의 산물일 뿐이 아니냐고 레나의 입을 통해서 말하고 있는데, 그것조차 픽션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픽션 속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던지고 있다는 점이 재기 발랄하게 느껴진다.
소설을 읽는 동안 화자가 말하고 있는 사실들이 자꾸만 어긋나는 것 때문에 갸우뚱하게 되는데도 불구하고 가독성이 떨어지지 않는 이유는 의식의 흐름 기법 때문이다. 보통 의식의 흐름 기법은 서사에 집중되지 않아서 가독성이 떨어지게 마련인데, 이 소설은 그렇지 않다. 등산에서 등산으로, 술집에서 술집으로, 침대에서 침대로 자연스럽게 공간과 시간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문장과 문장의 자연스러운 연결과 흐름은 결말과 서두의 내용이 연결되면서 완결된 구조를 치밀하게 보여주고 있다.
시작하는 이야기와 끝나는 이야기가 연결되면 이야기는 순환한다. 마치 인물과 인물이 연결되고 순환하는 것처럼 소설의 구조도 그렇게 이어진다. 그러면서 질문도 함께 맴돈다. 서술자와 작가, 현실과 픽션, 배우와 그녀, 글 속 인물과 실제 인물 중 어느 쪽이 실재하는가에 대한 질문과 더불어서 크리스토프와 막달레나는 크리스와 레나 중 어느 쪽이 더 원형에 가까운가에 대한 질문까지 끝없이 돌고 돈다.
우리는 당연히 안다. 실존에 대한 질문은 끝나는 질문이 아니라, 시작하는 질문이라는 것을. 그리고 영원히 끝나지 않을 질문이라는 것도. 그러므로 소설의 구조처럼 돌고 도는 질문이라는 것까지 알고 있다. 그래서 이 소설은 흥미롭다. 실존에 관한 우리의 질문을 소설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은 분명히 어려운 일인데, 소설로 잘 느낄 수 있게 만들어놨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