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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콜릿책방지기 Mar 23. 2024

<모리스 씨의 눈부신 일생>

흑맥주를 마시면서 읽기를 권합니다

   유언장을 작성한다면 어떤 형식으로 하는 게 좋을까 하고 생각할 때가 있다. 가까운 사람들에게 미처 하지 못했던 말을 정리해서 적게 될지, 죽고 난 뒤에 처리해야 할 일들을 당부해야 할지 생각하다 보면, 유언장이라는 글은 너무 감상적이 되거나 지나치게 형식적인 글이 되기 쉬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면에서 보면 모리스 씨의 유언장이나 마찬가지인 이 소설은 감상과 형식의 중간에서 적절하게 잘 만난 듯한 느낌이다. 소설이라는 형식을 만나서인지, 모리스 씨의 독백이 지나치게 감상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물론 모리스라는 실존 인물이 직접 쓴 것이 아니라, 앤 그리핀이 만든 모리스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래도 유언장을 쓴다면 이렇게 쓰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자신의 일대기를 하룻밤 안에 정리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지만, 호텔 바에 앉아서 좋아하는 술을 한 잔씩 홀짝이면서 기억할 만한 사건들만 떠올린다면 살아온 날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만 남게 될 것이다. 모리스 씨는 다섯 잔의 술만큼 자신의 인생에 대해 이야기해 준다.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 다섯 명만 추려서 그들에게 건배하면서 말이다. 


   어린 시절 모리스 씨에게 가장 중요한 영향을 끼친 토니 형에 대한 기억은 역경에 부딪칠 때마다 극복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주었을 것이다. 정해진 길을 가라고 윽박지르기만 하던 시절에 용기를 주고 응원해 주면서 함께 세상에 맞서자고 하던 토니 같은 사람이 인생에 한 명만 있어도 괜찮게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토니는 모리스 씨가 성공한 인생을 살 수 있게 만들어준 사람이다. 


   두 번째 건배를 바치는 몰리는 토니를 향한 마음의 연장이다. 모리스 씨가 어렵게 얻게 된 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죽어버린 일은, 승승장구하던 인생에 걸린 브레이크이기도 하다. 토니는 응원이었다면 몰리는 제동이다. 인생이 항상 마음먹은 대로 흘러가지는 않는다는 사인이기도 하다. 


   돌러드 가문을 향한 원한이 조금씩 누그러들 수 있었던 건 노린 덕분이다. 세 번째 건배를 바치는 노린은 모리스 씨가 금화에 대해 새로운 관점으로 볼 수 있게 만들어준 사람이기도 하고, 정말 소중한 존재가 무엇인지 생각하게 해 준 사람이다. 그리고 네 번째 건배는 아들인 케빈 몫인데, 자신과 너무나도 다른 케빈을 보면서 인생이 정말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절감했던 것 같다. 마지막 건배는 복수와 성공만을 위해서 달려온 자신의 인생과 화해하는 건배다. 그런 건배를 바칠 사람은 세이디밖에 없을 것이다. 


    모리스 씨의 건배를 보면서 우리도 자연스럽게 흑맥주 한 잔을 앞에 두고 그의 일생을 따라가면서 우리 인생에서 가장 큰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원한을 오래 품고 있는 것이 삶에 얼마나 도움이 될 수 있을지, 성공한 인생이 가져다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사랑하는 사람들이 곁에 없을 때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는 게 좋을지와 같은 문제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다 보면 이 소설이 잘 읽히는 것에 비해 던져주는 주제들이 제법 묵직하다는 걸 깨닫게 된다. 


   혹시 언젠가 유언장을 쓰게 된다면 모리스 씨의 일대기처럼 써볼까 싶기도 하다. 물론 이렇게 재밌는 소설이 되지는 못하겠지만, 유언장보다는 재밌게 읽어주지 않을까. 

   음, 어쩌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더 큰 고통을 만들어줄지도 모르니 소설을 잘 쓰게 되지 않는 이상, 괜한 짓은 하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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