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우 빼어나게 잘 쓴 소설
사랑하는 대상과 갈등이 격해졌을 때 싸움이 극단으로 치닫는 것을 느끼는 순간,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이상한 말을 할 때가 있다. 말이 밖으로 나온 순간, 파국은 명백해진다. 상대는 내 말을 절대로 용서할 수 없게 되고 그것을 나 또한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 말을 내뱉은 순간에도 그것이 정말 진심이었는지는 확신할 수가 없다. 만약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분명히 다른 말을 골랐을 것이다.
본인도 난데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런 선택을 하는 순간의 동인은 무엇 때문일까. 빌리의 모습을 보다 보면 의아함의 저변에 있는 어떤 이유를 찾아볼 수 있을 것 같다. 돈을 잃고 따면서 빌리의 마음속에서 순식간에 일어나는 심리적 변화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의 이성이 언제나 눌러왔던 어떤 욕망이 불쑥 고개를 들고 있는 게 느껴진다. 자신의 현실과는 멀지만 항상 동경해 왔던 일확천금의 꿈이라든가 불쑥 내지를 수 있는 객기 같은 것 말이다. 빌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 안에서 절제하면서 단순하게 살아왔지만 그런 가치 체계가 잠깐이라도 무너진 순간 아주 쉽게 취약해진다.
이성으로 통제하던 것이 무너진 순간 우리는 숨겨져 있던 욕망이 어디까지 치달을지는 스스로도 알 수가 없다. 평소에는 한계가 어디까지일지 확인하는 것이 겁이 나서 섣불리 그런 시도를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계기가, 권총의 방아쇠를 당기는 그런 계기가 불쑥 강력하게 다가온다면 아마 손가락에 힘을 주게 될 것이다. 자신을 향해서든 혹은 타인을 향해서든 상관없이. 빌리가 자신을 향해 당겼다면 나는 타인을 향해 당겼다는 차이점만 있을 뿐이다.
빌리가 하룻밤 만에 파국으로 치닫게 된 계기는 소설이 시작하는 순간부터 암시되어 있다. 보그너와의 만남은 자신의 미래를 예견하게 해 주었기 때문에 선택은 자명해진다. 이렇게 도입부에서부터 빈틈없이 꽉 짜인 구성으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매우 빼어난 형식미를 보여주는 고전주의 소설이다.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기승전결의 전개, 절정에서의 카타르시스를 정확히 보여주고 있는 아주 잘 쓴 소설이다.
만약 이런 전형적인 구성의 소설이 전근대적으로 느껴진다면, 빌리와 대척점에 있는 인물인 레오폴디네를 보면 된다. 그 어떤 현대 소설의 인물보다 더 현대적인 인물로 등장하는 이 여성 인물은 이 소설에 결정적인 힘을 부여하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 심리를 아주 빼어난 소설적 형식 안에 담은 소설을 읽기를 원한다면 바로 이 소설을 읽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