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투아니아 문학을 처음 볼 수 있는 기회
전쟁은 우리를 지독히 잔인한 이분법적 세계로 몰아넣는다. 적군과 아군, 가해자와 피해자, 우리 편과 다른 편이 있을 뿐이다. 그런 세계에서는 보통 사람이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 법이다. 사람으로 보이지 않으니까 아무렇지도 않게 러시아 병사가 독일인 아이들을 향해 수류탄을 던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상황이 아니라면 러시아 병사에게 독일인 아이들은 그저 아이들일 뿐이다. 아이들을 죽음으로 몰아간 “파시스트”라는 정체성이 무엇인지 정작 아이들은 모른다.
2차 대전이 끝나고 난 뒤 “독일인”이라는 이름은 증오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데, 바깥에서 보면 독일어를 쓰는 사람들은 모두 균질하게 “파시스트”로 인식이 되지만 개별적 인간으로 봤을 때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특히 아이들의 경우는, 그저 영문도 모른 채 증오의 대상이 되어 있게 된다. 전쟁에 관한 이야기에서는 보통 아이들은 종종 누락되어 있으며, 특히나 가해국의 아이들의 경우는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그런 생각은 더욱 복잡한 가치의 충돌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짧게 끊어지는 문장들과 시적인 묘사들 때문에 이 소설이 가치의 충돌을 말하고 있다는 걸 금방 눈치채기는 힘들다. 하지만 영문도 모르고 죽거나 쓰러지는 아이들, 헨젤, 보리스, 레나테, 헤인츠를 보고 있으면, 그들의 국적과 이름에 상관없이 이것은 잘못된 일이라는 사실이 명백해진다. 아이들은 자신들의 이름이 무엇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저 주어진 삶을 살아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걸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레나테가 한시도 주저하지 않고 마리톄로 이름을 바꾸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생존을 위해 분투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우리는 그들의 고통과 비참함의 원인이 전쟁이 야기한 이분법적 세계로 인한 것이라는 사실을 점차 깨닫게 된다. 그리고 이런 세계를 만든 것이 어떤 어른이라고 한다면 다른 어른인 우리는 그런 세계를 종식시키는 일을 해야 한다는 당위가 생겨난다. 인간은 너와 나, 우리 편과 다른 편으로 갈라서 살기에는 너무나 복잡다단한 존재들이고 그런 존재들이 조화롭게 살기 위해서는 되도록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단순하게 둘로 갈라놓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이 소설은 깊이 생각하게 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