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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콜릿책방지기 Jun 25. 2024

<전쟁과 평화 3>

대가의 작품은 역시 다릅니다.

   전쟁과 평화 3권은 전쟁 문학의 백미를 보여주고 있다. 톨스토이는 전쟁학과 역사학에 대한 다양한 고찰과 전쟁 영웅에 대한 비판적 인식까지 이 책에서 모두 담아내고 있다. 소설에서 작가의 목소리가 툭 튀어나와서 설교를 하기 시작하면 독자는 이내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거나 슬금슬금 뒷문으로 빠져나가 도망칠 생각을 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노련한 대작가는 고대 영웅서사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현대 인간의 모습을 노래하고 있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는 것에 충실하다. 우리는 작가가 흥미롭게 구축해 놓은 다양한 인물들을 따라가면서 그들에게 몰입하다 보면 그것이 작가의 연설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어느새 마음 깊이 감동하면서 작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이 책에서 중점적으로 그리고 있는 것은 보로디노 전투인데, 아우스터리츠 전투에 비해 더 격렬하고 더 많은 사상자가 있었으며 더욱 무의미했던 전투였기 때문에 전쟁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게 된다. 전투가 격렬해진 상황에서는 전쟁영웅이라고 하는 나폴레옹이나 쿠투조프가 제아무리 치밀한 지령을 내린다고 하더라도 서로가 죽이고 죽는 곳에서 그 모든 명령이 진정으로 무의미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작가는 권력자의 시선으로부터 시작해서 다양한 목적으로 전쟁에 참여한 귀족들의 모습을 통과해서 민중들의 모습에까지 가닿는다. 그리고 전쟁 바깥에 있는 사교계 여성들의 모습 또한 빼놓지 않는다. 전쟁이 일어난 당대의 모든 계층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는 그저 다양한 인간군상을 스케치하는 것에 그치지 않기 때문에 이 거대한 스케일에 압도되어 감동을 느낄 수 있다.   


  특히나 전쟁에 결코 어울리지도 않고 무척이나 어설픈 피예르의 눈을 통해서 전쟁의 속성을 잘 보여주고 있는데, 그는 전투가 벌어지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알지 못하고 마치 어린아이처럼 그 상황을 관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투에서 그가 바라본 병사들은 이해할 수 없이 풀이 죽어있거나 과도하게 흥분해 있었는데, 그런 개개인의 태도들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알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가 안드레이 공작을 만났을 때 공작의 입을 통해 비로소 전쟁의 의미를 알 수 있게 되는데, 전쟁을 겪고 있는 중에 그런 의미를 알게 된다는 것은 두 사람 모두에게 안타깝고 힘든 일이다. 


   “전쟁은 예의를 차리는 것이 아니라 인생에서 가장 역겨운 것이고, 우리가 이것을 이해해야만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걸세. 우리는 엄격하고 엄숙하게 이 무서운 필연성을 다뤄야 해. 요컨대 허위를 버려야 하는 거야. 전쟁은 어디까지나 전쟁이지 절대 장난이 아니니까.”(325)


  전쟁은 누구에게나 참혹한 흔적을 남긴다고 여기게 되지만, 작가는 계층과 입장에 따라서 다른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나폴레옹과 쿠투조프가 전투 현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허영심에 찬 상태로 멀쩡히 있는 것과 안드레이가 치명적 부상을 입게 된 것은 분명히 다른 결과이다. 그리고 로스토프 일가가 피난하는 과정에서 사람을 싣고 가는 것보다 값비싼 물건을 싣고 가는 것을 당연히 여겼던 귀족들의 비인간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분명히 그런 속성을 알고 있기 때문에 공작영애 마리야가 농민들에게 호의를 베푼다고 생각했던 것에 농민들은 호응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미천하다고 여기더라도 군중들도 알 것은 다 안다. 


   “왜 나리와 상인은 다 도망치고 우리가 대신 죽어야 하는데? 대체 왜, 우리가 개새끼냐, 우리가!”(512)


   그렇지만 라스톱친의 모습이 희생양을 던져주자 군중들이 흥분해서 달려드는 모습에서는 우매한 민중을 권력자들이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이런 모습은 현재 우리에게도 유효하다는 걸 생각하면 역사가 진보한다는 믿음은 신화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대작가에게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안드레이 공작과 나타샤의 화해도 그렇지만, 피예르를 통해 보여주는 러시아와 프랑스의 화합이다. 원수를 용서하라는 말을 설교로 듣는 것은 거북하지만 안드레이 공작이 아나톨을 용서하는 것도 그렇고, 피예르가 프랑스인 랑방 대위와 우정을 나누게 되는 장면에서 우리는 그 말의 의미를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동시에 마당에서는 게라심과 요리사와 프랑스 병사들이 말이 통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웃고 떠드는 장면이 백미라고 생각한다. 더구나 피예르가 불속에 갇힌 아이를 구할 때도 러시아인들이 돕는 것이 아니라 약탈하던 프랑스 병사들이 자신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피예르를 돕는데, 작가는 이 장면을 통해서 귀족들 뿐 아니라 민중들도 똑같이 고귀한 마음을 갖고 있다는 것을 너무나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전쟁은 승자와 패자를 가르는 행위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모스크바가 프랑스에 점령당했다고 해도 이미 텅 비어있는 그곳이 나폴레옹에게는 큰 의미를 갖지 못하는 데다, 러시아의 정신, 그들의 “독특한 경멸감”은 그들을 온전히 지키고 있다는 걸 웅변하고 있기 때문에 이 전쟁의 진정한 승자와 패자는 누구도 가릴 수 없게 된다. 바로 이런 점이 대가가 보여주는 전쟁 문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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