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평화라는 주제로 말하고자 하는 역사의 필연성과 자유의 문제
역사적 사실이 필연적으로 일어났어야 하는 일이었을지, 혹은 인간의 자유 의지로 인한 결과인 것인지에 대해 결론을 내리기는 어려운 문제다. 톨스토이는 전자 쪽에 무게를 두고 이 소설을 썼지만, 그렇게 도달하기까지 얼마나 깊은 고민을 거듭했는지 『전쟁과 평화4』권에 여실히 드러나 있다. 치열한 고민과 치밀한 자료 조사 때문인지, 소설을 끝내야 하는 시점에도 미련이 남아서 에필로그를 두 개나 더 붙이고 있는 걸 보면 그의 고뇌의 크기를 짐작해 볼 수 있다.
4권의 시작에서는 안드레이 공작이 공작영애 마리야와 나타샤의 간호를 받다가 장엄한 죽음을 맞이하는데, 공작의 죽음이 말하고 있는 것은 죽음 앞에 선 인간에게는 그 어떤 인간의 감정도 사소하게 보인다는 것이다. 피예르는 프랑스군의 포로로 잡혀 있는데, 이때 만났던 플라톤 카라타예프를 통해서 큰 깨달음을 얻는다. 톨스토이는 피예르를 통해서 귀족이 아닌 사람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으며 그들이 가진 삶의 태도를 통해 삶의 지혜를 볼 수 있게 한다. 삶에 대해 단순하고 솔직한 자세로 임하는 것, 누구와도 대립하지 않고 둥글둥글한 태도로 살면서 모두를 사랑하는 것이 아마도 작가가 원하는 이상적인 인간의 모습인 것 같다.
2부에서 보로디노 전투를 복기하면서, 전쟁의 동인과 결과가 몇 명의 개인적 의지로 인한 것이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치밀하게 들여다보고 있다. 전투에서 일어나는 우연성과 자유로운 힘들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나폴레옹의 미숙함과 대비해 투루조프에 대한 재평가를 시도한다. 육십 년의 경험을 축적한 노련한 노장으로서 투루조프는 공을 세우기 위해 더 이상 쓸데없는 희생을 원하지 않는다. 그가 전쟁에서 보는 것은 장군을 위한 기회가 아니라 병사를 한 명이라도 살리기 위한 기회인데, 이런 점을 역사가들은 긍정적으로 평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인간적인 면은 역사의 기록으로 남기기에 그리 매력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파르티잔으로 활약하는 돌로호프를 바라보는 페탸의 시선도 비슷하다. 돌로호프는 영웅이지만 “외모가 평범하다는 것이 이상하게도 놀라웠”다고 말한다. 역사적 영웅들을 만드는 것은 역사가의 오색찬란한 덧칠이지, 있는 그대로 보는 인물은 그저 평범한 사람일 뿐이라는 걸 페탸를 통해 말하고 있다. 페탸는 그 세계, 즉 “마법의 나라”에 있었기 때문에 현실적인 전쟁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죽는다.
재밌는 것은 쿠투조프가 두 번이나 우는 장면이 나오는데, 인물의 성격을 면밀하게 보여주는 이런 모습들이 소설의 재미를 더한다고 생각한다. 전혀 비범하게 보이지 않는 이 장군은 전쟁으로 인한 희생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 한 번 울고, 황제에게 탐탁지 못한 대접을 받더라도 결과를 보고하면서 한 번 더 운다.
이처럼 다양한 인물들을 보여주면서, 역사적 필연성과 자유 의지의 길항관계가 역사적 결과로 이어진다는 걸 말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의외로 작가는 우연성 쪽에 슬며시 손을 들어주고 있다. 그리고 인간 존재의 의미에 대해 고뇌하던 피예르도, 국가를 위한 대의에 힘이 되길 바라던 니콜라이도 각자 가정을 이루어 행복하게 사는 것으로 끝난다. 게다가 그들의 행복은 지극히 현실적인 가정의 모습이라서, 우리가 도달하기 힘든 행복은 아니다. 피예르가 깨닫고 난 것, 과잉보다는 부족이 더 행복이 가까운 것이라는 사실을 유념한다면 말이다.
“피예르는 포로로 바라크에 수용되어 지내는 동안 인간이란 행복을 위해 만들어진 존재이며 그 행복은 자신 안에, 즉 자연스러운 인간 욕구를 만족시키는 데 있다는 것을, 그리고 모든 불행은 부족보다 과잉에서 생긴다는 것을 이성이 아닌 자기 전 존재, 자기 삶을 통해 깨달았는데, 이 행군의 마지막 삼 주 동안 그는 이 세상에 무서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또 하나의 새롭고 위안이 되는 진리를 배우게 되었다.”(241)
그렇다면 톨스토이는 이 책을 통해서 평화를 얻었을까. 그토록 집요하게 써내려 갔던 전쟁의 모습을 다각도로 면밀하게 들여다보면서 자신의 마음은 평화를 얻었을까. 어쩌면 작가 자신의 내면의 평화를 위해 우리는 행복한 피예르와 나타샤, 니콜라이와 공작영애 마리야를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에필로그까지 포함해서 매우 19세기적 소설을 보면서 여전히 감동을 느끼는 이유는 작가가 제시하는 이상적 결론이 멋있어서가 아니라, 그 많은 인물들이 모두 생생하게 살아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 또한 작가가 원하는 인간형이 되고 싶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삶이 연결해 준 모든 것을 사랑하고, 모두와 화목하고, 특히 사람에 대해서는 특정인만이 아니라 눈앞에 있는 모든 사람과 화목했다.”(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