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라는 밀림 속에 숨어 있는 야수의 모습
“진정으로 그녀를 사랑했다면 운명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랬다. 인생다운 인생을 살 수 있었다. 그를 위해 살았고 그를 사랑했던 그녀의 인생이야말로 삶다운 삶이었다. 그녀가 어떠한 열정을 품고 살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반면 그는 소름 끼칠 정도로 이기심에 사로잡힌 채 자신의 필요에 따라서만 그녀를 판단했다.(그 사실이 그를 숨 막히게 했다.) 돌연 그녀의 말이 다시 떠오르면서 온갖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가 늘 기다려 온 야수는 정말로 숨어 있다가 운명의 순간에 튀어나온 것이었다.”(112)
여기 평범한 남자가 있다. 그 남자 존 마처는 특별한 운명을 꿈꾼다. 자신이 특별하게 태어났을지도 모른다는 환상, 그 환상을 부여잡고 평범하게 보이도록 살아간다고 믿는다. 언젠가 운명의 계시가 자신의 알 수 없는 불안감의 근원을 해명해 줄 것이라고 믿는다. 그 믿음이 너무 강력해서 스스로 선택해서 살아가는 것이 운명이라는 걸 깨닫지 못한다. 어쩌면 특별하지 않다는 걸 인정하기가, 범속한 삶이 아름다울 수도 있다는 진실을 받아들이기가 너무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환상 속에 살고 있는 이 남자를 사랑한 여자가 있다. 꿈속에 살고 있는 남자가 깨어나길 기다리지만 기다림은 죽음이 찾아올 때까지 계속된다. 이 여자 메이 바트럼은 남자가 찾는 것이 무엇인지 진작 깨달았지만 알려주지 않는다. 자신이 알려주는 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히려 남자가 끝까지 그 사실을 알아채지 못하기를 바란다. 차라리 알지 못한다면 남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것도 아닌 삶을 살다가 죽게 될 것이고 그것이 우둔한 남자가 받아들여야 할 삶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작가는 남자와 여자가 끝까지 평행선으로 달려가는 삶을 절묘하게 그려내고 있다. 뭔가 보이지 않는 대단한 어떤 것이 존재하는 것처럼 여자와 남자는 말하고 있지만 정작 둘이 지시하는 대상이 정확히 무엇인지에 대해 서로가 확인을 하지 않는다. 추상적 대상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그려내는 순간 그 의미가 시시해지고 빛을 잃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독자는 그 의미를 추측하느라 긴장을 풀 수가 없다. 둘 사이에 존재하는 차연은 끝까지 둘을 만날 수 없게 하지만, 독자는 그 속에서 의미를 찾아 헤매는 즐거움을 누리게 된다.
<밀림의 야수>에서 보여주는 모호함과 고딕풍의 전개는 <밝은 모퉁이 집>과 연결이 되는데, 두 단편을 읽다 보면 에드거 엘렌 포가 떠오른다. 삶의 내부에서든(밀림의 야수) 바깥에서든(밝은 모퉁이 집) 계속 떠돌면서 인물들을 불안과 공포에 떨게 하는 존재, 야수나 유령과 같은 존재들은 모두 포의 단편들에서 익숙하게 보던 것들이다. 다만 헨리 제임스의 경우는 음산함을 한 겹 걷어낸 느낌이랄까. 유령을 만난 스펜서 브라이든이 기절했다가 깨어났을 때 앨리스 스테이버튼이 옆이 있는 것만 봐도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예술가들에게 삶에서 진정한 의미를 찾는다는 것은 진짜 예술을 한다는 것, 진품이 되는 무언가를 생산한다는 뜻일 텐데, <진짜>의 주요 인물인 화가에게 그 의미는 혼란스럽다. “내게는 다른 괴벽, 진짜보다 재현된 주제를 더 좋아하는 타고난 괴벽이 있었다.”(17)고 말하던 화가가 모나크 부부와 같은 진짜 신사와 숙녀를 보면서 매혹되는 걸 보면 진짜와 가짜의 가치를 혼동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현실에서의 진짜와 예술을 통해서 화가가 보여주는 진짜의 가치는 다르다는 것을 혼동했던 것은, 아무래도 모나크 부부가 지난 세기의 박제품과 같은 모습을 오롯이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짝퉁>에서도 진주 목걸이가 진품인지 짝퉁인지에 대한 문제가 등장하는데, 목걸이 자체의 진품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문제다. 브래드쇼 양이 숙모의 유품으로 받은 이 목걸이는 의미와 맥락에 따라서 짝퉁이 되어야만 하고(아서), 진품으로 빛나기도 한다(가이 부인).
헨리 제임스가 이 단편들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삶의 진정한 의미가 겉으로는 진품과 가품의 한 끗 차이처럼 보이지만, 삶이 보여주는 환상과 실재를 구분하는 것이 야수와의 싸움처럼 어려운 것이라는 걸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