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로 보여주는 전시
이 책은 작가가 어느 작은 서점 안에서 마주친 한 여자의 얼굴, 그 얼굴에 나타난 심술궂은 시선과 난폭한 이미지에 놀란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 여자는 놀라운 아름다움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사람이면서 수백 장의 사진으로 남은 사람이었고, 또한 다양한 이야기로도 존재했던 사람이다. 작가는 이 여자에게 사로잡혀서 자신이 주관하던 ‘폐허’와 관련된 기획에 주제로 삼고 싶어 진다. 이 여자, 카스틸리오네 백작 부인에 관한 자료를 찾으면서 떠오르는 단상들은 어느새 작가의 삶과도 연결된다. 그럼 이 책의 장르는 무엇인가. 한 인물에 대한 전기인가,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회고록인가, 혹은 소설인가. 그렇지 않다면 전시될 대상을 문장으로 끌어온 일종의 전시물인가.
실재하는 삶과 가상의 삶이 섞여 들어가는 세계에서 살고 있는 지금과 같은 시대에 책은 물론이고 다양한 문화적 결과물을 가지고 장르를 구분한다는 것이 시대착오적인 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 책을 소설로 읽느냐, 사실에 대한 기술로 읽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것 같기는 하다. 소설 속에서 허용되는 허구적 장치와 상상력은 범위를 훨씬 더 넓혀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카스틸리오네 백작 부인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는 소설로 읽힌다. 사진 속에 박제된 이 여인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것은 작가의 상상력이며, 남겨진 자료 바깥의 것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검색해서 알 수 있는 이 여인에 대한 자료는 몇 장의 사진과 특정한 관점으로 기술된 설명인데, 대체로 그것들은 대상화거나 도구화된 한 여자의 모습이다. 그 여자가 연출하고 있는 사진과 시선에 대해서는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무심한 대중의 시선을 붙잡아서 끌어놓는 것, 그것이 전시 기획자가 하는 일이라고 했을 때, 작가는 독자의 시선을 이끌어서 이 여인을 바라보게 한다.
일반인들이 좀처럼 닿을 수 없는 자료들을 꺼내어 마치 눈앞에서 보고 있는 것처럼 그려볼 수 있도록 묘사하는 방식으로 보여준다. 우리는 사진들을 직접 볼 수는 없지만 작가가 보여주는 방식, 묘사하는 문장들을 통해서 본다. 기획자의 의도대로 전시를 감상하게 되듯, 이 책이 보여주는 전시는 카스틸리오네 백작 부인이 찍은 수백 장의 사진 중 작가가 선택한 몇 장의 사진들에 주의를 기울여서 보게 된다. 그 사진이 담고 있는 의미도 동시에 본다. 이 전시에 대한 감상의 깊이와 폭은 독자의 몫이다. 작가의 문장을 어떻게 독해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진다.
여기에 작가의 기억과 생각이 들어가고, 그것들은 전시에 대한 감상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확장한다. 도슨트의 해설을 듣는 것과도, 전문가의 해석을 읽는 것과도 다르다. 다른 감상자의 감상을 들으면서 사진을 본다. 여인의 ‘폐허’를 우리 눈에 띄게 만든 것, 그것으로도 작가가 기획한 이 ‘전시’의 의도는 성공한 셈이다.
사실 작가는 카스틸리오네 백작 부인의 의도를 알아채고 시간을 초월해서 그녀의 의도에 동의한 셈이다. 이미 백작 부인은 자신이 매혹적인 피사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사진이 보여주는 의미에 대해서도 알고 있어서, 사진가 부르주아에게 ‘협업’이라고 말하지 않았나. 그녀는 단지 자신의 아름다움만 과시하고 진열하지 않는다. “동작이 일단락될 때 춤추는 이가 마치 메두사의 머리를 본 듯 그 사위를 멎게 만드는 방식”으로 “기억을 고정”시키는 방식으로 자신을 전시한다. 그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은 이 소설을 쓰고 있는 작가이고, 그 사실 또한 우리에게 전시하고 있다.
이 전시의 마지막에서 우리가 보는 사진은 세 소녀의 뒷모습이다. 그중 하나는 작가의 어머니인데, 어떤 소녀가 자신의 어머니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중 하나가 카스틸리오네 부인이 될 수도 있다. 그들 앞에 놓인 운명은 시간보다 나이가 많아서, 그들이 박제된 그 순간처럼 그렇게 이어지므로 우리는 여전히 카스틸리오네 부인을 보고 있다. 책의 표지 사진에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타원형 틀 안의 그 시선 또한 시간을 초월해서 우리를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