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 명의 멋진 러시아 작가를 만나는 방법
작가가 경제적 형편상 책을 모두 처분하고 나서 텅 빈 책장을 바라보면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책장을 조금씩 채우려는 욕망을 갖게 되기가 제일 쉽지 않을까. 하지만 이 작가는 그런 쉬운 길은 거부한다. 비어있는 공간은 그대로 두고 ‘구상’으로 채우는 일을 시도한다. 심지어 구상을 문자화하는 것은 금지한다. 영혼을 보존하기 위해 순수한 구상을 글쓰기로 변질시키지 않겠다는 시도라고 하는데, 그것은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러니까 이 소설은 태생 자체가 자기 태생에 대한 거부이기도 하다. 문자화에 대한 거부를 기록한 것이기 때문이다. ‘문자 살해 클럽’에 모인 사람들에게 엄격하게 적용된 규칙은 글쓰기를 하지 않는 것이다. 글쓰기는 제한된 사람들의 소유였기 때문에 그 전문성에 거부감을 느낀 사람들이 모여서 구상할 권리가 누구에게나 있다는 원칙으로 자기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들은 자기들의 모임을 검증하기 위해 화자를 초대했는데, 결국 화자에 의해 구상이 모두 글쓰기로 변해버린다. 화자는 글을 써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고 하지만, 우리가 읽는 이야기들은 꽤나 그럴듯하고 재미있다.
화자를 초대해 놓고 일곱 명의 사람이 모여 다섯 가지 이야기를 들려준다. 각자의 구상을 들려주는 것이라서 이야기는 모두 연결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야기의 장르 또한 매우 다양하다. <햄릿>의 변용에서부터 시작해서 철학적 사변을 상징적으로 만든 이야기, 엑시니아라는 가상의 나라를 다룬 SF 이야기, 마치 우화처럼 보이는 말과 키스, 음식에 관한 이야기, 전통설화처럼 보이는 오볼 이야기까지.
이야기는 들려주기도 하지만 수정되기도 한다. 마음에 들지 않는 면이 있다고 다른 식으로 다시 말해달라고 하면 동일한 인물로 다른 버전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마치 글쓰기를 수정하는 작가처럼 구상도 수정되고 결말을 바꾸기를 요구받기도 한다. 구상은 글쓰기와 다르게 텍스트로 남지는 않지만 실시간으로 상처를 남긴다. 처음 이야기를 들려준 라르는 결국 상처를 이기지 못하고 목숨을 버린다.
라르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화자는 자신이 들었던 말들을 문자로 전환한다. 말만으로 떠도는 것들이 결코 문자보다 더 의미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말은 사악하고 집요하다. 누구든지 말을 한입 베어 물고자 하는 사람은 말을 죽이기는커녕 곧 말에 죽임을 당하고 말 것이다. … 이제, 말들을 돌려주려 한다. 전부, 단 하나만 제외하고. 그 하나는 바로 ‘삶’이다.”(214)
이제 우리는 작가가 반어적으로 말하고 있는 의미를 안다. 아무리 문자를 버리려고 해도, 말만으로 남으려고 해도, 그것이 최선이 아니라는 걸 말이다. 어쩌면 소련의 엄혹한 시기에 이렇게라도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면서 동시에, 우리에게 삶을 가르쳐주는 것은 결국 책이라는 걸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