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녀 관계와 천재적 영화감독 사이 어디쯤에 있는 이야기
이 책은 좀 특이하다. 평범하게 읽히는데 평범하지 않다. 남편을 잃은 아내의 일상과 감정을 기술하는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아내의 관점인지 모호하다. 읽기는 쉬운데 읽다 보면 묘하게 미궁에 빠지는 느낌이다. 말하자면 딸인 작가가 어머니의 관점으로 자신에 대해 쓴 글이랄까. 그래서 어머니의 관점이면서 동시에 딸의 관점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어느 순간 정말로 딸의 관점이 되어 있기도 하다. 아버지의 임종 직후 파리에 있던 딸이 그 소식을 듣고 브뤼셀로 오는 그 순간의 이야기는 분명히 딸의 관점이다.
그런데 어머니의 시점과 딸의 시점이 섞이는 부분이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그냥 그대로 따라가면서 읽고 있게 된다. 그전에도 마치 의식의 흐름을 기술한 것처럼 마침표도 거의 없이 줄줄이 이야기가 나열되어 있어서 시점이 바뀌는 것을 바로 알아채기가 어렵다. 그런 면에서 보면 어머니와 딸이 마치 하나가 되어 있는 것 같은 느낌도 든다. 어머니는 딸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딸은 또 어머니의 관점으로 말한다. 둘은 이 소설 속에서 마치 자웅동체처럼 존재하는 것 같은데, 그렇다고 그렇게 밀착된 사이처럼 느껴지지도 않는다. 그래서인지 더욱더 현실 속의 모녀 관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어머니와 딸은 분명히 다른 존재이지만 동시에 어딘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것 같은 존재로 느껴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어머니가 자신의 과거를 모두 덮어버리고 잊어버리고 싶은 반면, 딸은 그 모든 것을 열어 보이고 싶고 알고 싶다. 그것이 어머니를 더 잘 이해하는 일이라고 믿는 것 같다. 무엇보다도 어머니가 말하지 않는다고 해도 침묵 속에 어머니의 과거가 포함되어 있으므로 딸은 그것을 감지하고 있다. 그것을 드러내어 말하는 것이 딸의 방식이라고 한다면 어머니는 묻어버리는 방식을 원한다. 하지만 소설은 어머니가 말하는 방식이다.
딸은 어머니를 대신해서 말한다. 상실의 아픔에 대해서도 대신 말한다. 대신 말해주는 것은 일종의 함께 아파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딸은 아버지를 잃었는데, 어머니는 남편을 잃은 것이다. 그것에 대해 작가는 어머니를 대신해서 말해주고 싶어서 이 소설을 썼다. 그래서 결국 자신에 관한 이야기로 만들었다.
“내 딸이 하는 수많은 이야기 중 모두가 진실은 아니지만 개중 진실인 것도 있고 그건 보통 웃음을 자아내는 이야기보다는 슬픈 이야기가 대부분이고, 그 애는 우리가 함께 모여 있고 기억이 날 때면 웃긴 이야기도 하는데 그 이야기들도 항상 진실은 아니지만 가끔 진실이기도 하다.”(76)
서로를 상념에 빠뜨릴까 봐 말하지 않고 사는 모녀는, 그것이 끔찍하다고 생각한다. 작가는 아마도 그 끔찍한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이 소설을 쓰지 않았을까. 자식이 없는 딸이 어머니 되기를 통해서 감정적 승화를 조금은 이루지 않았을까. 가족은 언제나 어려운 문제다.
영화로 더 유명한 작가이고 영화를 보면 소설이 더 확장된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