끔찍한 비극 앞에서 던지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질문
유럽의 많은 작가들에게는 세계대전이라는 비극과 히틀러라는 괴물의 탄생이라는 역사적 사실이 어떤 형태로든 그들의 삶 속에 고통의 흔적으로 남아서 그것에 관해 쓰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 전쟁과 학살은 어느 나라에나 존재하지만 그것을 보편적인 경험이라고 말해버리기엔 우리 인간의 어떤 부분들이 큰 당혹감을 느낀다. 그런 일이 벌어지는 이유를 도대체 알 수 없어서 인간이라는 사실조차 부정하고 싶어지지만, 그런 일에 맞서는 힘조차 어디서 나오는지 알 수 없어서 당혹스럽다.
신형철 평론가가 말한 대로 이 소재는 정말 쓰기 어려운 것인데, 국가 간 전쟁도 아니고 민족 간 학살도 아니고 한 국가 내에서 한 지역의 시민들을 학살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톨스토이식으로 각 국가의 지도자와 장군들의 무능함과 잔인함을 그리는 것으로도 충분치 않고 수많은 유대 문학에서 발견할 수 있는 민족적 특성과 차이로 인한 몰이해와 박해를 말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 한강 작가가 에필로그에서 직접 언급한 대로 캄보디아의 킬링필드 사건이 비슷한 경우라고 본다면, 이런 사실을 어떤 방식으로 쓰느냐의 문제는 작가에게 정말 큰 도전이라고 생각한다.
이 끔찍한 비극 앞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질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존엄한가’였을 텐데, 작가는 그에 대한 대답을 하기 위해 동호라는 인물을 앞세운다. 동시에 동호를 일인칭 화자로 쓰지 않는다. 동호라는 인물을 알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동호 친구인 정대의 관점을 시작으로 해서, 김은숙의 관점, 김진수와 함께 있던 수감자의 관점, 임선주의 관점, 동호 어머니의 관점을 따라간다. 열여섯 살의 동호가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과 그 아이의 마음은 다른 인물들의 관점을 통해서 알게 된다. 그렇게 화자가 인물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말해주는 방식은 우리가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을 미연에 방지해 준다. 이 비극적 사실들은 작중 인물들 뿐 아니라 독자들 또한 눈을 부릅뜨고 바라봐야 하기 때문이다.
죽거나, 고문을 당한 후 자살하거나, 살아있어도 살아있는 것 같지 않은 인물들이 주저 없이 투신했던 그날의 선택은 무슨 의미를 남기는가. 우리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그런 질문을 떠올리게 된다. 그들의 경험 속에서 남는 것은 아래와 같은 씁쓸한 질문이 선행되면서 무력감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인 것입니까? 우리들은 단지 보편적인 경험을 한 것뿐입니까? 우리는 존엄하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을 뿐, 언제든 아무것도 아닌 것, 벌레, 짐승, 고름과 진물의 덩어리로 변할 수 있는 겁니까?”(134)
그런데 동호는 누구와도 혼동될 듯한 얼굴, 평범한 얼굴을 가진 아이라서, 누구나 될 수 있는 우리의 얼굴이기도 하다. 그는 희생자가 아니므로, 그저 희생자가 되고 싶지 않아서 기꺼이 죽음을 선택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들이 우리를 밝은 쪽으로 이끄는 것이다.
“선생은 압니까, 자신이 완전하게 깨끗하고 선한 존재가 되었다는 느낌이 얼마나 강렬한 것인지, 양심이라는 눈부시게 깨끗한 보석이 내 이마에 들어와 박힌 것 같은 순간의 광휘를.”(116)
작가가 부르는 동호라는 인물의 이름을 우리도 함께 부르는 순간, 그가 우리를 이끌고 있는 것을 느낀다. 그 이름을 부르다가 울컥 눈물이 솟아오르고 감정이 사정없이 흔들리게 되더라도, 우리는 앞으로도 계속 그 이름을 불러야 한다는 것을 안다. 그래야만 우리는 잊지 않고 우리의 존엄을 지키는 법에 대해 오래도록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