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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명하는 사랑>

사랑에 대해 다시 한 번,

by 초콜릿책방지기

어떤 소설은 그 내용보다 제사가 더 매력적이라 기억에 남는 경우가 있다. 작가가 그런 문장을 찾아서 독자에게 전달해 주기 위해서 소설을 쓴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 때가 있다. 이 소설도 그런 쪽이었고, 제사가 소설에 관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으며 모든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이 이 소설에 대한 찬사인지 혹은 혹평인지 헷갈리기는 한다. 하지만 제사를 읽고 나면 어느 쪽이든 무슨 상관일까 싶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군중 속에 있는 그를 알아보고, 그가 속해 있는 집단에서 그를 고유하게 떼어놓는 것, 아무리 단단한 집단이더라도. 그의 가족이든 다른 무엇이든. 그러고는 그가 자신 안에 가두고 있는, 어쩌면 전혀 다른 본성을 지녔을 그의 고유한 무리와 다양체를 찾아가는 것.”


소설의 화자는 아직 교수직을 얻지 못한 물리학자이며 남편이자 한 아이의 아버지이다. 직업적 불안과 가족의 행복 사이에서 균형을 찾으려는 노력을 하며 살아가고 있지만 누구나 그렇듯 화자도 현실과 일상에 자주 발목이 잡힌다. ‘오류가 없는 학문적 완벽성만 중시하는’ 화자는 관계를 형성하는데 서툰데, 그런 그를 무장해제하고 다른 면을 드러나게 한 사람이 그의 아내인 노라다. 사랑에 빠져서 결혼했고 아이를 가졌는데, 이후에 닥쳐오는 가정일의 무게는 예상을 넘어서는 일이다. 이런 일은 젊은 부부에게 흔히 일어나는 일이긴 하다. 부부는 도움을 받기 위해 가사도우미를 고용한다. 처음에는 가사도우미 A 부인이 불편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의 역할이 커져서 언젠가부터 없어서는 안 될 존재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어느 날 A 부인이 피곤하다는 이유로 갑자기 일을 그만둔다. 젊은 부부는 다시 돌아오길 간청하지만 전혀 먹히지 않는다. 당혹감과 서운함 뒤로 현실적인 어려움이 바로 몰려온다. 가사도우미 없이 일을 하며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녹록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부인의 빈자리는 현실적 어려움을 드러내는 동시에 부부간의 문제도 드러낸다. 다른 가족들과의 관계에서도 어색함과 불편함에 완충 역할을 해주던 부인이 사라지고 나니 부부는 서로가 서로에게 맞닿는 것이 쉽지 않다.


사랑이라는 것은 낭만적인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제사에서 본 것처럼 다시 태어나는 것에 가까운 일이다. 자기 모습 그대로 온전히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알아봐 준 상대방을 위해서 자신 안에 감춰진 다른 모습을 발견하고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 사랑이다. 부부와 아이는 A 부인에게 의지하는 동안 이전 세대 스타일의 편안함에 안주하고 있었지만 부인이 사라진 뒤에는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화자는 A 부인이 간직하던 남편의 수집품과 난쟁이 화가가 남긴 그림들이 의미 없이 처분되는 것을 보면서 현재에 충실해야만 하는 이유를 찾는다. 부인의 사랑이 화석처럼 되었다고 한다면 자신의 사랑은 지금 생생하게 살아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어쨌든 미래의 고고학자가 본다면 A 부인이 남긴 유산에서든 자신이 남길 유산에서든 별로 다르지 않은 것을 볼 테니 말이다.


노라 역시 자기만의 방식을 고수하던 것을 어느 정도 타협하기로 한다. 살던 동네를 떠날 수 없다던 고집을 버리고 미래의 선택에 대해 문을 열어둔 것이다. 에마누엘레로서는 자신에게 가장 큰 사랑을 주었던 부인에게 애정을 담아 이름을 불러주는 것이야말로 최선을 다한 사랑의 표현이다. 셋은 모두 사랑을 위해서 자신들의 껍질을 깨고 나아가는 중이다. 사랑은 이렇게 한 사람의 인생을 변화시키는 가장 큰 힘이다.


소설은 제사의 의미를 충실히 보여주고 있고 젊은 부부가 꾸린 가정의 모습을 현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사를 더 매력적으로 느끼는 건 아무래도 화자가 물리학자로서의 정체성보다는 엘리트로서의 정체성을 더 드러내고 있는 것 같은 대목이 종종 보이기 때문인 것 같다. 시점의 혼란은 번역의 문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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