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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소녀들>

사춘기 소녀들이 가지고 있는 솔직한 욕망

by 초콜릿책방지기

아마 예닐곱 살쯤 되었을 무렵이었을 것이다. 건너편 집에 살던 한 살 위 여자아이와 가까워져서 그 집에 자주 드나들었다. 부모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고, 할머니의 보살핌을 받고 있던 여자애는 할머니가 집을 비울 때마다 나를 자기 집으로 불러들였다. 여자아이는 마치 바바처럼 나를 대했는데, 그게 싫으면서도 놀 사람이 없어서 여자아이를 찾아갔다.


그 집에 가면 잠시 인형 놀이를 하다가, 여자아이는 할머니 방으로 들어가서 쿰쿰하고 오래된 냄새가 나는 이불을 깔았다. 그 위에 이불 한 겹을 더 덮고 이불 사이로 들어와 누우라고 했다. 자고 싶지 않던 나는 혼자 인형놀이를 하다가 여자아이가 계속 부르는 소리에 들어가 누웠다. 여자아이가 이불속에서 하자고 했던 다른 놀이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감정을 만들어냈다. 금기와 해방, 죄책감과 호기심 사이 어디쯤에서 오락가락하며 혼란스러워했던 것 같다. 그러다 여자아이와 멀어지고 나서는 오랫동안 그 감정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어느 날 바바와 캐슬린이 선명한 색채의 옷을 입고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아마 그 감정을 더 이상 기억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여성의 성적 호기심과 그에 대한 사회적 억압, 억압으로 인한 죄책감, 죄책감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 같은 것들을 문학 안에서 다루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이 소설은 사춘기 소녀의 다채로운 욕망을 보다 솔직하게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라고 생각한다. 단순히 어린아이의 성적 호기심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소녀들이 나이 많은 남자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망까지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여성의 성적 욕망뿐 아니라 나이 많은 남자 혹은 유부남에 대한 욕망은 좀 더 복합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먼저 고려해야 할 것은, 소설의 배경이 되는 공간이 매우 제한적이라는 사실이다. 캐슬린과 바바가 자라난 공간은 아일랜드 시골의 작은 마을이다. 그 마을에서 소녀들이 볼 수 있던 남성들이라곤 문제가 많은 아저씨들과 유부남들 뿐이다. 제대로 된 또래 남자아이들을 만날 수 없었던 환경에서 벗어나 소녀들이 처한 환경은 수녀원이라는 또 다른 제한된 환경이다. 성별로 강력하게 분리된 집단은 종교적으로(혹은 사상적으로) 철저하게 세뇌하지 않는 이상,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하기 마련이다. 신시아가 캐슬린를 찍어두고 자연스럽게 키스하는 것이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으며, 신부들과 수녀들의 관계를 성적으로 상상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폐쇄적 공간에서 벗어나기 위해 수녀원에서 탈출한 소녀들에게 더블린이라는 환경은 갑작스럽게 열린 공간이다. 캐슬린은 술만 퍼마시고 폭력을 행사하는 아버지와 그런 결혼생활에 희생된 어머니를 보며 자라났고, 바바는 말이 통하지 않는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를 무시하는 어머니를 보며 자랐다. 두 소녀들의 무의식에는 결혼생활에 대한 거부감이 자리 잡고 있을 것이라서 성적 욕망의 해소와 결혼을 연결해서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게다가 소녀들이 자랐던 시골에서는 성적 욕망을 금기하는 동시에 소녀들에 대한 어른들의 성희롱이 끊임없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던 곳이어서, 소녀들이 나이 많은 남성들에게 반응하는 것이 당연해 보인다.


결혼 가능성이 없는 상대에 대해 사랑만 꿈꾸는 순진한 소녀들, 그들을 욕망하는 부유한 유부남들. 이 구도는 더블린이라는 도시에서 일어나는 매우 상투적인 관계들이다. 캐슬린은 자신이 묵고 있는 하숙집의 요아나 부부, 자신이 일하는 식료품점의 번스 부부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자신이 알고 있던 결혼생활과는 다른 무언가를 찾으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분명히 그들에게서 희망이나 낭만을 찾지는 못했을 것이다. 캐슬린이 원했던 삶을 젠틀먼씨가 줄 수 없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소녀들은 실패한 삶이라고 하더라도 그 길을 직접 가보기 전에는 알 수 없을 것이고,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아쉬움과 후회는 언제나 남을 것이다.


욕망은 도덕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서, 소녀들의 욕망은 여기 그대로 남겨두어야 한다. 바바와 캐슬린처럼 한동네에서 계속 살아야만 했다면, 나도 역시 할머니와 살던 그 여자아이와 더 오랫동안 어울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자라난 나의 소녀는 어떤 식으로 욕망을 키워왔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쨌든 소녀들이 어떤 욕망을 갖고 어떻게 그것을 키워갔든, 그녀들의 삶이 아일랜드의 작은 마을에서 벗어난 것만큼의 의미를 가지고 나머지 삶을 살아갔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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