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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스트 1>

골방에서 나와 인간적 삶을 찾아가는 과정

by 초콜릿책방지기

평생 고귀하고 초월적인 것을 탐닉하던 파우스트 박사. 박식하고 뛰어난 학자로 알려져 있지만 박사 자신은 그동안 쌓아온 지식으로는 삶이 충만하다고 느끼지 않는다. 그런 파우스트를 두고 주님과 악마가 내기를 한다. 주님이 보기에 파우스트는 영혼이 단단하지만 활동력이 느슨해진 상태라서, 악마인 메피스토펠레스의 자극이 필요한 상태다. 메피스토는 인간 이성의 힘이 대단치 않다고 생각하고 유혹에 쉽게 굴복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주님이 메피스토에게 장난질을 허락했으니 파우스트는 이제 악마의 실험 대상이 된 셈이다.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유혹들이 등장할 것인데, 남성으로 설정된 인물인 파우스트에게 여성을 향한 미혹된 마음이 가장 처음 나오는 것이 당연해 보이기도 한다. 파우스트가 여성이었다면 차은우 쯤 되는 미남 캐릭터가 등장했을 것이고, 게이였다면 유아인 정도를 예상할 수 있으려나. 레즈비언이었다면 어떤 인물일까 상상해 보는 것도 하나의 재미일 것이고, 다른 성적 지향에 대해서는 각자의 취향에 따라서 생각해 보면 될 것 같다.


어쨌든 인상적인 것은 파우스트가 미혹된 대상인 그레트헨이 파우스트에게 먼저 다가가 유혹을 한 것이 아니라 지나가던 그레트헨에게 파우스트가 먼저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이다. 메피스토의 마법 때문이기도 하지만, 파우스트란 인물은 어쩐지 실전 연애 경험이 전무해서 약간의 자극에도 쉽게 넘어가게 된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괴테는 스스로를 현실주의자라고 칭하면서도 파우스트는 골방에 갇혀 평생 실제의 삶과 괴리된 채 지적인 욕구만 채워온 인물로 그리고 있다는 것이 재밌는 점이다.


일단 파우스트가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만 들여다봐도 이 골방 서생에 대한 측은한 마음이 생겨난다. “나는 한 번도 세상과 어울리질 못했다네. 다른 사람들 앞에만 서면 왜소하게 느껴지니. 언제나 당황하게 마련일걸.”(136) 실험 도구와 책으로 가득한 자신만의 방에 갇혀서 지낼 때는 자신이 마치 신처럼 느껴질 때도 있지만 막상 밖으로 나오니 그런 기분은 온데간데없다. 인간적 삶과 유리된 고귀하고 초월적 세계에 이제 염증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살아있는 인간으로서 생생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해 왔다는 것이기도 하다. 이성과 감성, 이상과 현실, 초월적 세계와 실재하는 세계로 거칠게 나누자면 파우스트는 전자의 세계에서만 살아왔던 것이다. 그랬던 파우스트가 메피스토를 만나서 이제 열망하게 된 것은 후자의 세계다.


“다시 말하지만, 쾌락의 문제가 아닐세. 이러한 도취경에 내 몸을 맡기는 것일세. 고통스러운 향락, 사랑에 눈먼 증오, 속이 후련해지는 분노에. 지식에의 갈망에서 벗어나 나의 마음은 앞으로 어떤 고통도 감수하면서 인류 전체에게 주어진 것을 내 내면의 자아로 음미해 보려네. 내 정신으로 가장 높고 가장 깊은 것을 파악하고, 그 기쁨과 슬픔을 내 가슴에 쌓아 올리면서 나 자신의 자아를 온 인류의 자아로까지 확대시키려네. 마침내 인류와 더불어 나 역시 파멸에 이르기까지.”(119)


그렇다면 이제 파우스트의 방향성은 명확해 보인다. 인간이 오랫동안 억눌려왔던 신의 세계에서 벗어나 인간 본연의 모습을 찾는 것, 실러가 말한 ‘인본주의’와 연결된 방향이다. 당대의 분위기에서 대놓고 말하기는 어려웠을 테니 악마에게 영혼을 판다는 비유로 말하고 있는 것 같지만, 이제 더 이상 신이 원하는 대로 살고 싶지는 않다는 선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차원에서 보면 파우스트가 그레트헨을 사랑하고, 사랑을 위해 살인을 저지르고, 그녀를 구하기 위해서 감옥에 들어가는 것까지 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자연스러운 사랑을 금기시하는 당대의 분위기가 드러나서인지, 당대의 금기를 깨는 사랑이야말로 인간적 삶에 가까이 가는 것으로 보인다. 2권에서는 파우스트가 어떤 식으로 더 파멸에 가까워질지 모르겠지만, 파멸에 이르는 과정이야말로 파우스트가 진정한 삶을 살아내는 과정처럼 보이지 않을까 싶다. 메피스토펠레스가 종종 진정한 철학자처럼 보이는 이유도 그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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