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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죽은 자와 산 자가 함께 존재하는 이유

by 초콜릿책방지기

흰색에 관하여 작가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말할 수 있을까 하는 궁금증을 갖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희다는 것은 상대적인 의미일 수도 있고, 여백일 수도 있고, 빛의 크기에 따라서 달라질 수도 있는 것이라서, 그 자체로 홀로 존재하기는 힘든 어떤 성질이니까 작가가 어떤 의미든 만들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작가가 말하고 있는 것을 읽는 동안 흰 것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참 다양하게 뻗어갈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빨강이나 노랑, 파랑에 대해서는 분명히 어떤 경계가 느껴지니 말이다.


시각적인 의미도 있지만 촉감으로도 존재하고, 무엇보다도 추상의 영역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자꾸만 더 몽롱하게 만든다고도 생각했다. 유령이라든가 혼에 관해 생각할 때도 희뿌연 연기 같은 것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색의 경계뿐 아니라 삶과 죽음의 경계까지 넘나들 수 있다는 것은 이 책이 어떤 것에 대해 의미를 분명히 하고자 함이 아니라, 의미를 지우고자 하는 것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폭격으로 사라지다시피 한 도시, 그 도시의 사진 또한 멀리서 보면 흰색에 가까웠다고 하면서 작가는 그 도시에서 한동안 시간을 보낸다. 백야가 있고 겨울이 긴 그 도시에서 하얀색 페인트로 칠한 문 안에서 살면서 ‘흰’에 대한 것들을 떠올린다. 흰 개와 흰 파도 같은 것들과 하얀 강보와 수의를 떠올리다 보면 삶과 죽음이 교차하고, 태어나자마자 죽은 언니와 이제껏 살아있는 내가 얇고 투명한 종이 한 장 사이에 있는 것 같다. 어째서 누군가는 죽음이고 누군가는 삶인지 설명하기는 힘들다.


죽은 자들 위에서 산 자들이 계속 살아야만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생명이 그곳에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숨결은 희고, 그 흰색은 훼손되기도 쉽고 더럽혀지기도 쉬운데, 지속되어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죽은 생명은 아무런 의미 없이 사라진 것일까. 그런 질문에 대한 대답 역시 ‘흰’이다. 죽은 생명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 그들에 대해 말하는 것은 살아있는 생명이다. 그 생명의 생기는 희고 투명한 것이다. 말하고 있는 희고 투명한 입김과 흰 종이에 꾹꾹 눌러쓴 문장들의 혼은 죽은 생명에게 부활을 가져다주는 ‘흰’ 것이다.


정확히 의미를 알 수 없고 경계도 뚜렷하지 않아서 ‘흰’에 대해서는 말하기 어렵다. 이분법적 세계에서는 그중 하나에 대해 말하기는 쉽지만, 그 사이 어딘가에 대해서는 정의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그동안 알던 구분과 경계를 허물고 뚜렷한 선을 지운다. 삶과 죽음도 넘나들면서 함께 존재한다. 그것이야말로 영문을 모른 채 사라져 갔던 혼이나, 슬프고 억울하고 절망적이었던 혼들을 위로할 수 있는 길이다. 구분이 사라진 ‘흰’ 곳에서 함께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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