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고통>

고통으로 가득한 세상을 대하는 괜찮은 태도

by 초콜릿책방지기

2차 대전이 유럽인들에게 얼마나 큰 충격과 상흔을 남겼는지 알고 싶다면, 그때의 이야기를 쓴 작가들을 찾아보는 게 제일 좋다. 당장 떠오르는 작가만 하더라도 이렌 네미롭스키, 슈테판 츠바이크, 로맹 가리, W. G. 제발트, 헤르타 뮐러, 이언 맥큐언, 피에르 르메르트 등등이 있는데, 츠바이크는 고도의 문명을 이룬 유럽인들이 예상치 못했던 잔인함을 보여줬다는 것에 절망해서 자살했다고 하니 작가들이 느꼈던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니 뒤라스가 2차 대전 당시에 썼던 글들을 “고통”이라는 제목으로 묶어내는 것은 적합해 보인다.


전쟁은 그동안 이룬 모든 질서와 가치와 문화를 파괴하고 세상을 이분법적 의미로 갈라놓는다. 적과 아군, 생존과 죽음 중 어느 한쪽에만 속할 수 있는 세계에서 기존의 도덕과 철학이 무너질 수밖에 없을 텐데, 신기하게도 뒤라스는 보다 본질적인 의미를 잊지 않아서인지 양분된 세계의 어느 한쪽에만 속해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아마도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이 책이 읽히는 힘을 갖게 되는 모양이다.


맨 앞에 수록된 작가의 일기는 프랑스가 독일의 점령지가 되었다가 해방된 직후에 일어난 일을 기록한 것이다. 뒤라스는 함께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던 남편이 포로로 끌려간 상태다. 남편의 생사를 알 수 없지만 그를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돌아오길 애타게 기다린다.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던 동료들의 도움으로 겨우 돌아온 남편이 시체나 다름없는 상태에서 살아나는 과정은 당사자에게도, 기록자에게도, 독자에게도 모두 고통스러운 일이다. 이 기록들에서 발견할 수 있는 뒤라스의 관점들은 인상적이다. 전쟁을 겪으며 고통을 받았던 여인들이 용서하기도 전에 제멋대로 먼저 독일아이를 용서해 버리는 신부의 모습을 지적한 것이라든지, 유럽에서 일어난 반인류적인 일들에 대해 독일만 책임질 문제가 아니라 모두가 함께 책임을 져야 한다는 주장들이 그렇다.


“이 범죄에 대한 유일한 답은 이 범죄가 모두의 범죄라는 것이다. 이를 나누어 가지는 것. 평등이나 박애와 같은 사상처럼. 이 범죄를 견뎌내기 위해서는, 이런 범죄를 만들어 낸 사상을 포용하기 위해서는 범죄를 나누어야 한다.”(78)


아마도 당시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이런 생각은 지금의 관점으로 보면 오히려 타당해 보인다. 함께 살아가던 유럽에서 독일이 전범 국가가 되긴 했지만, 그렇게 되었던 원인과 과정에서 엮이지 않았거나 자유로웠던 유럽인은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더라도 뒤라스는 죄의식을 함께 나누어야 인류가 보다 나은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뒤라스가 적국에 대해 열린 태도를 보일 수 있었던 것은 독일인을 가까이서 자세히 관찰할 수 있었던 덕분이기도 하다. 함께 수록된 단편의 내용이 일기의 상황과 연결되는데, ‘테레즈’라는 이름으로 작가 대신 등장한 인물이 남편을 구하기 위해서 독일군 게슈타포의 정부로 나온다. 게슈타포인 라비에씨와 함께 지내다 보니 그도 한 인간이라는 것을 발견하는 대목에서는 영화 <색,계>가 떠오르기도 하는데, 인물들이 맞이하는 결말은 다르다. 붙잡혀서 재판을 받는 라비에씨가 사형이라도 면하게 하려고 테레즈가 증언을 하는데, 이런 태도 또한 당시에는 취하기 어려웠을 행동이다.


여기에 더해서 독일이든 프랑스든 상관없이 자신의 욕망을 채울 수만 있다면 하루를 살더라도 욕망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테르가 있다. 아마도 테르와 같은 인물이 밀고자와 연결이 될 텐데, 뒤라스는 밀고자를 고문하는 레지스탕스들의 모습과 아무런 생각 없이 지내는 테르의 모습을 나란히 보여주고 있다. 이들을 보고 있다 보면, 어떤 진영에 속해 있든 상관없이 인간은 그저 복합적이며 한계가 뚜렷한 존재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게 된다.


이 책에 수록된 글들이 쓰인 시점에서부터 40여 년이 지난 후에 출판된 것은 의미심장하다. 전쟁 직후에 갈갈이 찢어진 마음과 채 아물지 못한 상처로 곤두서 있던 사람들이 읽기에 이 책은 시기적으로 적절하지 않았을 것이다. 고통이 어느 정도 가라앉고 난 후, 그 고통의 의미를 차분히 다시 들여다볼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이 좌우로 나뉘어서 서로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지금도 뒤라스의 문장들은 필요하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