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소금 조각>

자의식 과잉의 지식인이 보여주는 세계

by 초콜릿책방지기

주인공 루드빅은 사랑했던 에스테르와 헤어지고 나서 삶에 대한 환멸감에 빠져서 길을 잃는다. 에스테르가 진정한 사랑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지만 떠난 연인에 대한 원망과 증오가 더 커서 그 사랑의 의미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루드빅에게 지식과 철학의 안내자였던 스승 브룸에 대해서도 냉담하기는 마찬가지다. 브룸이 대학에서 쫓겨나고 고향에 돌아간 이후에는 한 번도 찾아가 보지 않다가 자신이 힘든 상황에 처하고 나서야 보러 가는데, 그때 브룸이 준 노트마저 기차에서 잃어버린다.


소설의 다양한 매력 중 하나는 인물이 갖고 있는 매력이기도 한데, 이 소설의 주인공에게서는 도무지 그런 면을 찾아볼 수가 없다는 점이 이 소설을 읽을 때 느끼게 되는 어려움이다. 주인공에게 공감하거나 공감하지 못하거나 하는 문제는 다른 차원의 일이다. 아무리 악인이라고 해도 인물 자체가 매력적이라면 마음의 어떤 면을 건드리게 된다. 소설 속에서 소금의 비유 중 하나로 나온 조커가 아주 좋은 예다. 소금이 부식과 정화의 기능을 가진 것처럼 조커의 광기도 양날의 검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그만큼 조커라는 인물이 가진 매력과 상징성이 두드러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루드빅의 경우에는, 자의식 과잉 상태에 있는 지식인이며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인간이고, 공허와 우울에 침잠해서 매사에 부정적이고 불평으로 가득한 데다, 주변 사람들에 대한 태도 또한 신랄하게 비꼬거나 우월감을 갖고 내려다보고 있는 위치에 있다는 것이다. 우연히 만난 인부들, 은행원, 가판대 노인, 여관 주인과 아이, 청소부 여자 등등을 통해서 깨달음에 이른다고는 하는데 그 과정도 작위적일 뿐 아니라 지식인이 계급적 차이를 뛰어넘는다는 점에 방점을 두고 있는 것처럼 보여서 깨달음의 진정성을 느끼기가 어렵다.


아우슈비츠라는 시대적 비극을 앞에 두고 브룸과 같은 지식인들은 환멸감과 더불어서 인간 존재 자체의 의미를 찾기가 어려워서 허둥댔을 것이다. 만연한 악과 야만이 시대에 지식이라는 것이 과연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인지 생각하다 보면 공포에 가까운 절망을 느꼈을 것이다. 인간의 지성과 역사를 지속해야만 하는 이유를 찾기 위해 랍비 뢰브의 글을 읽으며 또 다른 야만의 시대였던 이전 시대에 어떤 해결점을 찾았던 마하랄과 루돌프 황제의 대화를 알고 싶은 것 또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루드빅의 공허와 절망에는 공감할 만한 인과관계가 충분하지 않고, 소금의 상징 또한 너무 많이 흩뿌려놔서 주제와 긴밀하게 연관된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안타깝게도 영감을 주는 문장 또한 찾기가 어려웠다. 문장이 산만하고 지리멸렬한 묘사가 끝없이 이어져서 독자의 집중을 방해하기만 한다. 브룸의 조카 에바가 루드빅의 배신을 알아차리는 장면만 하더라도 그렇게까지 길고 자세한 묘사가 필요한지 의문이 든다. 독자에게 전달하고 싶은 것이 배신이라는 사실과 에바의 심리상태라고 한다면, 지나치게 긴 관능적인 묘사는 그 장면에서 부적절하고 불필요한 것이다.


어쩌면 작가가 너무 많은 의미를 담고 싶은 욕심이 과해서 주인공은 비굴해지고 이야기는 산으로 가게 된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 루드빅이 작가의 페르소나라고 한다면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투명하게 보면서 불필요한 것들을 걷어내는 편이 낫지 않을까 싶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고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