갇힌 세계를 풀어버리는 연금술사의 신비로운 힘
1956년 무렵 잉글랜드 어딘가에 황무지에 둘러싸인 페더호턴이라는 마을이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자연을 증오하고 있으며 방직 공장에서 일해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허세와 가식을 냉대하며 야망이 없어서 글을 읽고 쓰는 것을 멸시한다. 씻는 것조차 허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마을에 있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 성당. 백 년도 채 되지 않은 성당이지만 오랜 역사를 가진 성당처럼 보이려고 어설프게 고딕 양식으로 지은 거대한 성당이다. 성당을 가득 채우고 있는 성상들, 예를 들면 대장간 지킴이인 성 던스탄, 치과 의사들의 수호성인인 성녀 아폴로니아, 화살이 꽂힌 심장을 들고 있는 하마 주교 성 아우구스티누스, 사자를 데리고 있는 성 히에로니무스, 벌집이라고 불리는 성 암브로시우스, 외에도 수많은 기타 등등이 있다.
이 성당을 지키는 앵윈 신부는 이미 이십 년 전 신앙을 잃어버렸고, 그 사실을 감추기 위해서 미신에 기대고 있다. 마을 사람들에게나 앵윈 신부에게나 성상들은 필수적인 기도의 대상이자 장식품이다. 그런데 현대적인 것을 표방하는 주교가 찾아와서 라틴어 설교를 그만두고 지역어로 설교하라고 충고할 뿐 아니라 성상을 없애라고 지시한다. 성상들을 없앴는지 확인하기 위해 보좌신부를 보내겠다는 협박도 잊지 않는다. 페더호턴 마을에서 없어서는 안 될 성상들이지만 앵윈 신부의 거취 여부가 달려 있는 문제이기도 해서 신부는 성상들을 땅에 묻기로 한다.
성상을 땅에 묻고 난 어느 날, 빗속을 뚫고 플러드가 성당에 나타난다. 스스로 보좌신부라고 밝히진 않았지만 누구나 그를 보좌신부라고 받아들인다. 플러드가 오면서 은밀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일단 알코올중독자인 앵윈 신부의 술잔에서 위스키가 마르지 않는다. 분명히 위스키는 한 병이었는데 플러드와 함께 마시면 밤새 바닥을 드러내지 않고 충분하다. 성당 일을 봐주고 있던 미스 템프시 애그니스 또한 평소와는 다르게 설거지를 하지 않고도 잠이 든다.
엄마의 허영심과 가난 때문에 수녀원에 들어온 필로메나 수녀에게 일어난 변화는 가장 강력하다. 내면에서 뭔가 타오르는 것 같은 변화가 일어나다가 그 열기가 바깥으로까지 번진다. 필로메나는 플러드가 진짜 사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플러드는 그에 대해 가타부타 대답하지 않는다. 이상한 일은 사람들이 플러드를 보고도 그의 외모를 정확히 기억할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어느 날 앵윈 신부가 플러드에게 말한다. 플러드가 오고 나서 전반적으로 마을이 조용해졌다고. 플러드는 페더호턴 마을 사람들이 배척하던 네더호턴 사람들을 포용하고, 앵윈 신부가 악마라고 믿던 저드 매커보이에게도 손을 내민다. 심지어 오래도록 마비되어 있고 우울감에 빠져 있던 앵윈 신부의 심장에도 열정이 피어오르도록 만든다. 그 변화의 끝자락에서 플러드는 성상들을 모두 파내어 제자리로 돌려놓고 필로메나를 데리고 마을을 떠난다.
필로메나가 떠날 때 안토니오 수녀는 진짜 이름을 묻는다. 그리고 자신이 젊을 때 행하지 못했던 탈출을 감행할 수 있도록 필로메나 수녀, 아니, 로이진 오할로란을 돕는다. 로이진 오할로란이 떠날 때 원장 수녀를 제외한 다른 세 수녀들은 그녀를 배웅해 준다. 물론 앵윈 신부와 애그니스도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플러드를 배웅한다.
“오, 플러드. 그가 생각했다. 이 마법사의 제자 같으니. 당신이 가 버리자 더는 마법이 통하지 않는구려. 당신은 기적을 거꾸로 행했군요. 천상의 불을 꺼 버리고 신성을 가지고 고작 인간인 존재를 만들어 냈어요. 정신을 습하고 따스한 살로 바꾸었죠.”
어쩌면 지금, 2025년의 이 시대에도 삭막하고 살벌한 극단주의에 둘러싸인 이곳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딱딱한 원칙주의와 꼿꼿하게 선악을 가르는 근본주의가 아니라, 경계를 무너뜨리는 신비주의와 상상력이 필요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깊이 하게 만드는 소설이다. 플러드라는 실존 인물이 다시 태어나서 생생하게 살아있는 것이 소설 속뿐 아니라 우리 삶 속에서도 충분히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있도록 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연금술의 힘이 아닐까 싶다. 그러므로 아래와 같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에 진심으로 공감한다.
“공평함은 부족하지 않다. 사람들이 자신의 운명에 불평하면, 그들을 경멸하는 적은 고소해하며 이런 말로 두려움을 불어넣는다. 인생은 공평하지 않다고. 그런데 인생을 멀리 보면 물난리, 불난리, 머리 손상, 일반적인 불운이 아니라면 결국은 원하는 것을 손에 넣는다. 그것이 만사를 관장하는 숨겨진 평등의 법칙이다. 놀라운 점은 인생은 공평하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누군가 이미 말했듯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의가 아니라 자비다.”(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