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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여자의 열매>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연민

by 초콜릿책방지기

인간으로 태어나면 그 자체로 만족스러울 수 있을까.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사실 자체가 족쇄가 되지 않을까. 다른 존재가 되고 싶은 욕망을 없을까.


인간은 왜 이렇게 태어나서 이런 식으로 살아가야만 하는 것일까. 우리의 몸이, 우리가 사는 곳이, 우리가 먹고 마시는 것이 모두 우리를 규정하면서 동시에 옥죄는 의미가 되지는 않을까.


때로는 이런 질문들이 숨을 턱 막히게 하면서 몸속 깊은 곳으로부터 차오를 때가 있다. 해결할 수 없는 질문이지만 한 번쯤 던져보지 않을 수 없는 질문인데, 우리가 인간이어야만 하는 이유에 대한 질문은 언제나 근원으로 향하기 때문이다. 내가 나여야만 하는 이유, 어떤 우연이 작용해서 나라는 생명체가 되었나 하는 이유에 대한 한강 작가의 이런 질문들은 답을 구하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탐구와 연민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 여자의 열매>에서 아내는 살고 있던 아파트가 불편할 뿐 아니라 자기 몸에 대해서도 답답증을 느낀다. 그들이 살고 있는 집은 칠십만 인구가 모여 산다는 대단지 아파트로 모든 집이 똑같은 구조로 되어 있고 창밖으로는 차량의 불빛과 소리만 보고 들을 수 있다. 아내의 문제는 아파트라는 그 공간에 대해서 불편함을 느끼기 때문인가 하는 생각이 들지만, 소설을 읽다 보면 좀 더 근본적인 문제가 드러난다.


“내가 요즘 왜 이럴까. 자꾸만 밖으로 나가고 싶고, 밖에만 나가면…… 햇빛만 보면 옷을 벗고 싶어져. 뭐랄까, 마치 몸이 옷을 벗기를 원하는 것 같아.”(15)


아내가 원하는 것은 인간의 몸 자체에서 벗어나는 것인데, 도대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아내는 독백처럼 자신의 심정을 고백하는데, 거기서 답을 찾을 수 있을까.


“나는 한 번도 행복했던 적이 없었어요. 어떤 끈질긴 혼령이 내 목을, 팔다리를 옥죄며 따라다녔을까요. 아프면 울고 꼬집히면 소리치는 어린아이처럼, 나는 언제나 달아나고만 싶었어요, 울부짖고 싶었어요.”(34)


그렇다면 아내는 무엇으로부터 어디로 달아나고 싶었던 것일까. 인간 존재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 단편의 화자인 남편은 끝내 그 이유를 찾지 못했지만, 아내의 변신만큼은 묵묵히 받아들인다. 고독하던 남편은 아내가 떠난 것보다는 변신하는 편이 차라리 받아들이기가 수월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보기에 아내는 인간의 한계, 파괴성, 억압 등을 누구보다도 예민하게 느끼던 존재였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그런 아내는 달아나는 대신 그곳에서 변신하는 편을 택한다.


<해질녁에 개들은 어떤 기분일까>에서의 아내는 떠난다. 남편은 아이를 데리고 떠난 아내를 찾아서 떠돈다. 이 소설은 아이의 시점으로 되어 있어서, 아내와 남편의 마음을 직접적으로 알 수는 없다. 하지만 함께 트럭에서 붕어빵과 어묵 따위를 팔면서 살아가던 엄마가 떠난 이유는 아빠의 의심 때문이라는 것은 알 수 있다. 아이는 엄마가 떠난 것을 어렴풋이 납득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빠의 괴로움도 막연하게나마 이해할 수 있다. 해질녁 개들의 모습을 보면서, 줄에 묶인 개들을 보면서, 아이는 아빠의 심정을 관찰한다.


“아이는 개의 목을 묶은 줄을 눈여겨보면서, 그것이 팽팽하게 펴지더라도 안심일 만큼 거리를 두고 서서 차분히 개의 얼굴을 관찰한다. 저렇게 짖을 때 개의 기분은 어떤 것인지 알고 싶어서다. 언제까지 저렇게 짖어대는지, 언제 이빨을 드러내고 달려들기 시작하는지 시간을 재볼 생각이다.”(66)


엄마를 찾아 헤매던 아빠가 결국 아이와 같이 죽으려고 하는데, 아이는 자기에게 약을 먹이고 곧바로 토하게 만든 아빠가 밉지 않다. 그 개들이 숨기고 있던 기분, 그렇게 짖다가 결국 두려움에 꼬리를 내리는 그 마음으로부터 아빠의 마음을 짐작해 봐서 그럴 것이다.


<아기 부처>에는 연민을 사랑이라고 착각한 불행한 화자가 있다. 제 앞가림을 잘하는 오빠보다 약한 마음을 가진 화자에게 더 엄격했던 어머니의 교육 탓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뒤늦게 그걸 후회하며 불화를 그리는 것으로 마음을 다스리고 있지만 화자에게는 여전히 얼굴을 마음대로 바꾸는 아기 부처가 나타나고 있다. 인간의 마음이 가진 연민이 어디까지 닿을 수 있는지, 그것이 어떤 형태로 있는 것인지 말해주는 것처럼 말이다.


“믿기지 않는 일이었지만 나는 그의 흉터 때문에 그를 사랑한다고 생각했고, 이제 그 흉터 때문에 그를 혐오하고 있었다. 그의 흉터가 다만 한 겹 얇은 살갗일 뿐이라는 것을 나는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안다는 것이 내 마음의 얇은 한겹까지 벗겨내주지는 못했다.”(134)


인간이 인간을 향한 근본적인 연민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 그것이 자기 자신의 발목을 잡고 스스로를 더 옭아매게 만든다는 사실을 이 단편은 처절하게 말해주고 있는 셈이다.


“삶이 얼마나 긴 것인지 몰랐던 죄. 몸이 시키는 대로 가지 않았던 죄. 분에 넘치는 정신을 꿈꿨던 죄. 분에 넘치는 사랑을 꿈꿨던 죄. 자신의 한계에 무지했던 죄. 그러고도 그를 증오했던 죄.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가학했던 죄.”(135) 아마 그 누구도 화자의 마음보다 더 높은 곳으로 갈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하지는 못할 것이라서, 아기 부처의 얼굴이 오래 마음에 남는다.


<어느 날 그는>의 그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내면에 깊은 고독과 폭력성을 품고 있는 사람이다. 무척이나 성실하게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해내는 사람이라는 사실은 알 수 있지만 그가 그런 내면을 갖게 된 이유는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이 단편은 그에 대해 줄곧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는 화자의 거리감이 눈에 띈다.


그런 그도 사랑에 빠지지만, 그의 사랑은 파국에 이르고, 상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줄 수밖에 없게 되는데, 우리는 이민화의 말을 통해 그의 표정과 내면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화자의 거리감 때문에 더욱 위태롭게 느껴지는 이 인물은 당장이라도 살인을 저지를 것처럼 보이는데, 놀랍게도 우리는 마지막에 안도감을 느끼게 된다. 그에게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는 눈을 감았다. 델 것 같은 눈물이 굴러떨어졌다. 입술과 턱을 적신 그 눈물은 억센 힘줄이 드러난 목줄기를 타고 내려가 러닝셔츠로 번졌다. 바로 그 순간으로 인하여 그의 삶이 바뀌었으나, 그는 아직까지 그 변화를 실감하지 못한 채 무수한 그림자들이 춤추는 곡선 가운데 우뚝 서 있었다.”(239)


함께 수록된 단편들, <붉은 꽃 속에서>에서는 동생 윤이를 잃고 나서 승려가 된 화자는 폭력적인 현실에서 벗어나 자신을 들여다보며 평온함을 찾는 것을 보여주고, <아홉 개의 이야기>에서는 나중에 나올 작가의 작품들의 단상들이 엿보이며, <흰 꽃>에서는 『작별하지 않는다』의 씨앗들이 보이고, <철길을 흐르는 강>에서는 도시와 자연, 남자와 여자, 폭력성과 여성성의 대비에 대한 작가의 인식이 잘 드러나 있다.


작품집을 통해 작가가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연민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존재 자체의 근본적 이유에 대해서마저 사유하는 존재인데,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인간 존재 자체에 대한 연민 어린 시선이 작품집 곳곳에 녹아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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