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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해한 남자>

화가 펠릭스 발로통의 내면이 궁금하다면

by 초콜릿책방지기

화가가 쓴 소설이라는 사실은 작품에 대한 기대를 살짝 낮추게 된다. 다재다능한 사람도 많지만 소설이라는 장르 또한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도 알기 때문이다. 예상과 달리 소설 또한 뛰어나다면 놀라운 반전에 기쁠 것이고, 예상대로라면 그러려니 하며 받아들이기 쉬울 것이다. 다만 읽기 전에 질문이 더 생겼던 것은, 화가가 그림이 아니라 글을 통해서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그림으로 충분하지 않은 삶의 의미가 있었던 것일까, 자신을 다양한 방식으로 보여주고 싶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하는 궁금증들이 자연스럽게 생겨났기 때문이다.


화가 자신을 연상케 하는 주인공 자크 베르디에는 어릴 때부터 불운을 가져오는 인물로 설정되어 있다. 자크 때문에 제일 처음 죽음에 이른 벵상의 경우는 사고처럼 보이기는 하는데 이 또한 석연치 않기는 하다. 벵상은 자크가 자신을 밀었기 때문에 사고가 났다고 주장했는데, 주변에서는 벵상을 말을 믿어주지는 않는다. 두 번째 불운의 주인공은 세공사 위베르탱인데, 그가 죽음에 이른 이유는 자크의 장난 때문이라는 것이 확실하다. 하지만 이 또한 비난을 받지는 않는다. 자크가 솔직하게 사고에 대한 것을 털어놓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세 번째 희생자는 친한 친구인 뮈소인데, 이것 또한 애매하게 기술되어 있다. 자크가 뮈소에게 준 독약이 초록색 가루인 줄만 알았다고 하는데, 여기서는 주변 사람들이 자크의 주장을 전적으로 믿어주지 않는다.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뮈소가 죽었다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다. 그 죽음 앞에서 자크는 죄책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쉽게 잊기도 한다.


또 한 명의 희생자는 잔느인데, 자크 때문에 잔느가 화상을 입게 되는 과정 묘사는 꽤나 서툴러서 조금은 갸우뚱하며 그 장면을 상상하게 된다. 어쨌든 사고라는 것은 언제나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소설에서 개연성을 갖는 문제는 다른 법이다. 세상에는 우연으로 이루어지는 일도 많다고 할 수도 있지만, 이 또한 소설의 법칙과는 무관하다. 만약 이 소설이 기존 소설의 틀을 깨기 위한 실험적인 것이었다고 주장한다면 그땐 그 기준으로 다시 해부해 볼 수 있지만 그 정도의 실험성 또한 찾아보기 힘들다. 그래도 우리는 작가가 화가라는 점을 한 번 더 상기하면서 다음으로 넘어갈 수는 있다.


마지막 희생자인 몽테삭 부인은 자크가 지극히 사랑하는 대상이다. 절대로 자기 운명의 희생양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할 법한 대상이지만, 자크는 자신의 욕망 앞에서 자기 운명을 크게 고려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자크는 질투심도 많은 데다 허세도 많은 인물이라서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 보일지가 가장 중요한 고려 대상이다.


“그러나 이미 말했다시피 언제나 유별난 정신의 소유자인 나는 그가 내게 유독 친근하게 이야기하는 순간을 노려 대화를 끝내고 모자를 집었다. 그는 놀란 듯했다. 우리는 악수를 하였고, 나는 그곳을 빠져나왔다.”(54)
미술과 관련된 직업적인 면을 보면 능력 있는 인물처럼 보이지만 위의 문장에서 보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보면 미숙하고 자존심이 강한 인물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우리는 이런 예술가들에게 종종 “괴짜”라는 칭호를 붙여준다. 그런데 자크는 운명에게 미움받는 괴짜로 그려지고 있다.


근대 이후 개인의 발견이라는 큰 변화가 일어난 뒤에 우리에게 익숙하게 읽히게 된 인물들은 반영웅적인 인물들이다. 대체로 자의식이 강한 인물들이며 세계와 불화한다. 어쨌든 이런 인물들에게 독자는 공감하기도 하고 동정하기도 하게 되는데, 자의식의 어떤 부분에 납득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 이 인물 자크는 어쩐지 아직 설익은 느낌이다. 시대의 차이는 있지만 상황 설정이 비슷한 피에르 르메르트의 『사흘 그리고 한 인생』을 읽어 보면 그 차이를 인식할 수 있다. 시대적 차이를 기준으로 이 인물을 무조건 감싸주기에는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를 알고 있는 우리에게는 좀 무리한 요구인 것 같다. 하지만 펠릭스 발로통이라는 화가의 그림을 보고 나서 그의 내면이 궁금하다면 읽어 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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