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를 하는 여배우들의 내면이 궁금하다면.
소설을 통해서 만날 수 있는 흥미로운 이야기 중 하나는 예술을 주제로 한 것이다. 소설을 위한 소설도 있고, 예술가가 주인공이 되는 소설도 있고, 예술 자체는 논하는 소설도 있는데, 그 분야를 잘 아는 사람에게도 그렇지만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새로운 세계를 열어서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특정한 분야에 통달한 사람일지라도 소설을 통해서 만나는 그 분야의 이야기는 특별해지는데, 개별화된 의미와 객관화된 모습을 동시에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소설을 생각해 볼 때 처음 떠오르는 작품은 이청준의 『서편제』인데, 판소리라는 예술 분야에 대해 새롭게 환기하게 된 작품이라서 그렇고, 온다 리쿠의 『꿀벌과 천둥』도 떠오르는데, 피아노 연주는 귀로 들을 수 있는 장르임에도 불구하고 눈으로도 들을 수 있는 경이로움을 느끼게 해 준 작품이기 때문이다. 한강의 소설에서도 예술가들을 종종 발견할 수 있는데, 『그대의 차가운 손』의 장운형도 그렇고, 『채식주의자』의 형부, 『바람이 분다, 가라』의 정희와 인주, 삼촌들이 그렇다.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는 화가 폴 고갱을 모델로 했으니 본격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여기, 연기라는 특별한 예술 장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등구운의 『조연 여배우』가 있다.
언니가 연기를 하는 모습을 보고 나서 연기자가 되기로 한 주인공 황청은 자신이 연기를 시작한 동기가 그런 이유인 탓에 언제나 자기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안고 있다. 스스로가 타고난 연기자라고 생각하거나, 연기가 아니면 삶의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 아니라, 살면서 서서히 자신이 선택한 길의 의미를 깨달아가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을 보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알게 되는 건 그녀의 습성이었다.”(97) 이렇게 미망의 상태에 있다가 점차 깨어나는 인물 설정은 언제나 매력적이기는 하다. 게다가 우리가 잘 알 수 없는 배우의 세계에 대해서 제대로 말해주는 이야기라면 더 흥미로운 일이다.
기획사와 덜컥 장기 계약을 해버려서 발이 묶이기도 하고, 연기에 대한 평이 그리 좋지 않아서 절망하기도 하고, 주연을 맡기로 한 영화가 사고로 무산되기도 하는 우여곡절 끝에 황청이 알게 되는 것은 결국 그녀 자신이다.
“이제 그녀는 바뀌기로 결심했다. 정면으로 맞설 것이다. 흩뿌린 모래 한 줌으로도 사막을 바꿀 수 있다. 하물며 냉혹한 연예계나 난해한 예술계는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항상 깨어 있는 상태로 이곳에 남아 있어야만, 노예가 되지 않을 수 있다. 눈을 감은 황청은 결심과 힘이 자신을 둘러싸고 있다고 상상했다.”(196)
결심을 했다고 일사천리로 일이 풀리는 것은 아니지만, 때로는 뜻하지 않은 행운도 찾아오고 때로는 진실한 사랑을 맛보기도 하면서 자신이 정말 원하는 것을 알아가게 된다. “그녀는 스스로 공포와 통제와 같은 장벽을 넘어섰고, 오르내림을 끊임없이 반복한 끝에 오늘의 그녀가 된 것이었다.”(239)
결국 자신이 가야 할 길은 혼자만의 길이며, 연기의 길이라는 것을 발견하기까지 무수한 절망과 패배를 맛봐야 했고 언니까지 사고로 잃게 되는 아픔까지 겪었지만, 그 모든 과정이 황청이라는 ‘조연 여배우’가 자기중심을 찾아가는 시간이다. 그 과정에 관한 이야기가 허구처럼 느껴지지 않을 만큼 연기에 대한 열정이 소설 전체에 걸쳐 진하게 녹아 있다.
누구에게나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문제인데, 이 소설의 황청은 끊임없이 고통스럽게 자기를 응시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그 과정 하나하나가 자기 발견의 과정으로서 매우 중요하게 느껴졌는지, 작가는 조금은 사족처럼 느껴지는 장면들도 빠짐없이 넣어둔 것 같다. 그리고 연기자와 엄마라는 두 가지 역할을 모두 다 해내고 싶은 욕심이 복잡한 가족 구조를 탄생시켰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좀 더 좋은 대안이 없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어쨌든 황청이라는 인물은 소설 안에서 스스로도 말하듯, 평범한 외모에 완벽하지도 않고, 평범한 집안에서 자란 무난한 사람이라서 연기자로서는 물론이고 소설의 주인공으로도 그리 매력적이지 않은 인물인데도 불구하고 자기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독특한 개성을 만들어가는 데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예술 분야에 관한 소설을 떠올릴 때, 이 소설도 그 리스트 안에 들어가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