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야민을 좀 더 친근하게 만날 수 있는 기회
우리는 벤야민을 잘 모르지만 그가 유명한 사람이라는 사실은 안다. 유명하다는 것은 알지만 그의 글을 제대로 읽어보거나 곱씹어 본 경우는 거의 없다는 것이 아이러니하긴 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프로이트나 융의 이론을 확실히 읽어보고 나서 인용하는 경우도 드물다는 사실을 고려해 보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닌 것 같다. 그러니까 어떤 유명한 사람들은 그 사람이 착안한 개념 하나만으로도 우리에게 충분히 가깝게 느껴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문학 이론을 공부한 사람들에게는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 작품」과 같은 벤야민의 글을 읽어봤거나 어딘가에서 인용한 것을 본 적이 있다. 그 글이 이후에 도래한 예술사에서 워낙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 이유도 있지만 글 안에서 솟아 나온 핵심적인 개념어만으로도 기억할 만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탁월한 학자라고 하더라도 대중에게 각인되려면 그들이 제시하는 개념들이 단어 하나로도 유추할 수 있는 신비로움까지 갖추고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어렴풋한 믿음이 있다.
이 책은 막연하게 알던 벤야민을 좀 더 쉽게 가까이 알 수 있는 기회를 주는 동시에 조금은 의아한 생각이 들게 하기도 한다. 3부로 구성된 이 책에는 꿈과 몽상, 여행, 놀이와 교육론이라는 세 부분에 모두 미완성인 글들이 다수 수록되어 있어서, 습작 노트를 엿보는 기분이 드는 대목이 종종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을 구성한 편집자들이 벤야민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이미 세상에 있지 않은 그에게 헌정하고 싶은 마음으로 만든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도 생긴다. “편집자 해제”를 좀 더 꼼꼼하게 읽게 되는 것도 그 탓이다. 다행인 점은 해제가 이 책의 의도를 충분히 설명해주기는 한다는 것이다.
해제를 읽고 나서 다시 읽기 시작하면 벤야민의 아름다운 문장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는 깨달았다. 자신이 이 숲길을 지나가듯 다른 누군가도 지나간다는 것을. 앞서간 사람이 사라지지 않는 마법, 아는 장소, 아는 사람들이 새로운 장소, 낯선 사람들이 되는 마법이 존재한다는 것을. 아까 들려왔던 목소리가 어느 가사 없는 노래에서 꿈과 나무라는 각운을 아까보다 분명하게 맞추고 있었다.”(38) 그의 꿈이나 몽상 속에서 나타난 문장들은 구술과 전통 뒤를 따라가는 어떤 새로움, 그런 마술적인 것이 예술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걸 간접적으로 알려준다. 이런 면은 급변하던 당대에 그가 예리하게 포착한 예술의 의미와도 상통한다.
“벤야민은 예술 작품을 기계로 복제할 수 있는 시대에 관해서 쓴 글들에서 활동 영역 개념을 발전시키는데, 그 개념 속에 유희가 심겨 있다. …기술력은 인간을 강제 노동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개인은 자기의 활동 영역이 단번에 확장되었음을 알게 된다. 개인은 아직 이 영역을 잘 모르지만 자기의 요구들을 이 영역에 제출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유희는 기술력 변화의 결과이자 기술력 변화와 공존한다. 자아를 세계 속에서 재구성하는 것이 유희다. 그런 의미에서 유희 영역은 상상 속의 영역으로서, 영화나 라디오 같은 형식에 갇혀 있는 거주 능력과 습관화 능력을 펼칠 가능성이다. 하지만 벤야민에게 유희는 좀 더 보편적인 무언가이기도 했다. 유희는 모든 아이가 하고 싶어하는 그것, 곧 놀이다.”(327)
그러니까 꿈과 여행, 놀이는 하나의 선처럼 연결되어서 우리를 해방해 주는 것, 활동 영역의 확장이라는 의미로 수렴한다. 벤야민의 글에서는 단번에 포착할 수 없었지만 해제를 통해 그 글의 의도를 알 수 있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글이 모호하다는 의미일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충분히 오래 살지 않았기 때문에 글을 제대로 완성할 기회가 부족했다는 뜻일 수도 있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날카로운 통찰력은 자본주의를 도박에 빗대어 설명하는 것으로 충분히 알아볼 수 있고, 벤야민이 프루스트에 대해 쓴 문장에 이르러서는 그를 꼭 다시 한번 봐야만 한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는 그리움에 상처투성이가 되어 침대에 쓰러졌다. 그가 그토록 그리워한 세계는 현실과 비슷하지만 일그러져 있는 세계, 현실의 진짜 얼굴인 초현실이 돌발 출현하는 세계였다.”(3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