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찐팬이라면.
이 책은 영화나 드라마와 같은 영상 매체를 위한 창작자와 소설과 희곡처럼 문자를 위한 창작자를 가르는 기준은 어떤 것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전자와 후자 모두 현실을 뛰어넘거나 보완하는 픽션의 자리에 있는데, 그 양태와 의미는 사뭇 다르기 때문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영화감독이 쓴 이 소설은, 그 감독에 대한 팬심으로 읽어야 할지, 그의 영화와 소설의 차이를 비교 평가하면서 읽어야 할지 하는 가벼운 고민도 동반된다.
처음 수록된 <방문>은 어린 시절에 맡겨졌던 수도원에서 성적인 학대를 당했던 루이스라는 남자가 파올라라는 매춘부 여자로 분장해서 다시 방문하는 이야기다. 어디선가 봤던 영화처럼 느껴지면서도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이 작품은 알모도바르 감독의 개성을 잘 드러내는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두 번째 작품인 <지나치게 많은 성별의 변화>는 테네시 윌리엄스의 희곡 『욕망이란 이름의 전차』에 대한 패러디 혹은 그 작품에 대한 해석을 위한 소품처럼 느껴지는 소설이다. 원작을 패러디하는 글을 쓰는 화자와 화자의 글을 연기하는 레온의 관계를 보여주는 이 소설 또한 알모도바르 감독의 일부분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한 이야기다. <거울 의식>은 뱀파이어 백작의 이야기를 변형한 소설이다. 이미 수많은 뱀파이어의 이야기를 봐왔던 탓인지 신비주의자인 메니토 수사와 흡혈귀인 백작의 관계가 그리 새롭게 느껴지지는 않아서, 가볍게 읽을 만한 이야기다.
<아름다운 광녀 후아나>는 실존 인물인 후아나 1세를 가져와서 <잠자는 숲 속의 공주> 이야기를 덧붙여서 재해석한 이야기다. 현실의 결과와는 다른 결말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은 픽션의 힘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이야기면서, 우리는 누구나 이런 식의 픽션을 꿈꾸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알모도바르 감독이 여전히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고 느끼게 되는 것도 이런 면모 때문일 것 같다. <마지막 꿈>은 작가가 갖고 있던 가치관을 있는 그대로 고스란히 드러내주는 작품이다. 그래서 여기 나오는 문장들이 작품집 전체를 관통하는 메시지일 것 같다.
“엄마의 말이 옳았다. 엄마는 편지의 빈 곳을 채워주고, 이웃 여자들이 듣고 싶어 하는 내용을, 그리고 때로는 편지를 쓴 이가 깜박 잊고 빼먹었을 수도 있지만 듣고 나면 흔쾌히 고개를 끄덕일 만한 내용을 들려주었다. 엄마의 이런 즉흥적인 창작은 내게 커다란 교훈을 안겨주었다. 그것은 현실과 픽션의 차이, 그리고 현실이 더 완전해지고, 더 즐겁고, 더 살기 좋아지려면 어떻게 픽션을 필요로 하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었다.”(135)
<미겔의 삶과 죽음>은 스콧 피츠제럴드의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를 다시 쓴 것 같은 이야기다. 태어나면서 나이와 운명이 정해져 있다는 것만 다를 뿐, 엄마 뱃속으로 돌아가는 것이 마지막이라는 내용이 동일한 이 이야기는 아류작의 특징으로 인해 금방 잊힐 것 같다. <어느 섹스 심벌 여배우의 고백>은 마치 감독의 자기 고백처럼 보인다. 제목 그대로의 이미지를 가진 주인공의 마약과 섹스로 점철된 삶을 살다가 자신의 삶을 기록하기 위해서 작가가 되기로 한다는 마지막 부분을 보면 말이다. “나는 여행하고 글을 쓰며 살 생각이다. 그리고 모든 것을 여러분에게 전할 것을 약속한다. 내 삶은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누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까. 여러분 모두와 함께.”(191) 그런데 문제는 그게 작가에게는 의미가 있을지 모르지만 독자에게는 과연 의미가 있을까 하는 것이다. 그 삶에 대해 궁금한 사람에게만 의미가 있지 않을까.
<씁쓸한 크리스마스>는 유명 인사로 살아가는 삶, 마약과 파티가 있고 우연히 만난 사람과 사랑하고 자주 고독과 공허가 찾아오는 삶을 보여준다. <화산같이 살다간 이여, 안녕>은 차벨라 바르가스라는 실존 인물에 대한 이야기다. 아마도 그녀를 추모하기 위해 쓴 글 같은데, 그녀에 대한 애정이 진하게 드러나 있다. <속죄>는 예수를 한 사람의 인간으로 보고 ‘이방인’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이야기를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된 일화에 대한 감독의 해석과 함께 바라바스라는 도둑놈이 이방인을 구한다는 색다른 결말이 있는 이야기다. <공허했던 어느 하루의 기억>은 감독이 좋아하던 예술인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엔디 워홀과 바스키아, 마돈나도 있고 레일라 슬리마니의 책 이야기도 있다. <나쁜 소설>은 본인이 꿈꾸던 소설과 자신이 쓸 수 있는 소설에 관해 말하고 있는 이야기다.
감독 자신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좋은 소설을 쓰고 싶기는 했지만 자신이 쓰는 소설은 영화화하기 위한 각본에 가까운 소설이라는 것,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는 게 이 책이다. 영상을 위한 픽션과 문자를 위한 픽션은 모두 의미가 있지만 명백히 다르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좋은 소설을 읽고 싶다면 이 책을 권하지는 않겠다는 것이 책을 덮고 난 뒤의 결론이다. 감독의 팬이라면 당연히 사서 간직하라고 하겠지만. 그래도 여전히 평가는 남을 것이다. 영화가 더 나은 것 같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