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호하고 몽환적인 소설을 좋아한다면.
이 단편집을 읽고 든 생각은 외국 독자가 한강 작가의 작품을 읽고 나서 한국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게 되었을까 하는 궁금증이었다. 필리핀 작가가 썼다고 하는 이 소설집을 읽고 나서 나는 오히려 그 나라에 대해서 전혀 알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정체성이 모호하다는 것이 필리핀의 특징일까, 아니면 이 작가가 특별히 그런 걸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소설의 구조와 이야기가 가장 명확하게 드러난 것은 <삼대>인데, 동명의 작품인 염상섭의 소설과는 다르다는 걸 생각하면 재미있다. 아버지에게서 나온 폭력의 고리를 끊지 못하고 아들로 이어져 손자도 똑같이 그 폭력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인데, 이전 세대에 대한 비판적 인식은 같을지 몰라도 드러내는 방식은 다르다. 염상섭의 작품은 인물들의 내적인 분열에 대한 묘사가 배제되어 있다면, 이 작품에서는 그런 감정을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때도 자신은 아무리 아버지를 나타내는 것들을 모조리 거부하고자 한다 해도 결코 그에게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디를 가든 그는 아버지에게서 온 육체를 지닐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 육체는 일생이 지나고 채 꺼지지 않을 불길에 검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 언제까지고 자신 안에서 분열되어 자신과 대치하며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25)
마치 신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신처럼 군림하는 아버지를 극복하기 위한 아들의 몸부림은 필리핀이 식민의 역사에서 벗어나려는 몸짓처럼 보이기도 한다. 과거의 과오에서 온전히 벗어나지 못한 현세대가 다음 세대에게 무엇을 물려줘야 할지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는 흔적으로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이 작품의 전체를 관통하는 메시지가 보이는 것 같다. 하지만 토착 문화에 스페인 문화와 미국 문화가 뒤엉켜 있는 복잡한 역사 때문인지, 소설들이 모두 모호하다. 인물들의 갈등 요소가 종교적인 면으로 갑작스럽게 승화되기도 하고(<죽어가는 탕아의 전설>), 토착 문화의 미신적 요소가 가톨릭 문화와 섞이는 것에서 갈등이나 분열을 보여주기보다는 신비스러운 요소를 보여주면서 봉합하기도 한다(<성 실베스트레의 미사>). 흥미로운 점은 <하지>에서처럼 여성 지위에 대한 작가의 인식이 시대적 인식과 조응하는 면이 있는데 그런 것을 필리핀 토착 문화로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 흥미롭다.
작품을 통해서 조심스레 짐작해 보면 이식된 문화보다 필리핀 고유의 문화가 오히려 훨씬 평등 지향적인 요소를 갖고 있던 것을 간접적으로 드러낸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메이데이 전야>와 같은 이야기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미혼 상태의 젊은이들이 갖고 있던 결혼에 대한 미신적 장난을 보여주고 있는데, 제목이 상징하는 바가 묘한 울림을 주는 동시에 과거에 대한 짙은 향수에 사로잡혀 있는 인물의 모습에서 필리핀 사람들이 가진 현재에 대한 인식을 짐작하게 한다.
“사악한 늙은 달이 구석에서 어슬렁대는 곳이나 살인적인 바람이 휘몰아치며 휘파람을 불며 끽끽 대는 곳 빼고는 바다 내음이 퍼지는 지금, 여름 과수원 향기가 풍기는 지금은 창가에서 고개를 떨구며 흐느끼는 노인에게 참을 수 없는 5월 옛사랑의 추억을 떠올리게 했다.”(129)
묘하게도 표제작인 <배꼽 두 개인 여자>는 제목이 주는 묘한 매력을 느끼기 힘든 작품이다. 작중 인물인 페페 몬슨과 코니, 코니의 어머니인 비달 부인과 파코 모두 대체로 뚜렷한 이미지를 떠올리기 힘든 데다 상류층 혹은 엘리트 계층으로 짐작되는 그들의 모습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기가 힘들다. 작품 해설에서 말하고 있는 배꼽 두 개의 상징성이 스페인과 미국 두 나라의 식민 통치라는 점에도 동의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필리핀 현실에 대한 비판 의식이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난 작품이기는 하다.
“사람들은 미군에 잡혀 수용소로 끌려가는 남은 혁명군을 닫힌 창문 틈새로 훔쳐보며 통곡했다. 어린 비달 부인에게는 꽃 같은 시절이었으나 정치적으로는 암울하고 어두웠던 그 시절 내내, 완고한 젊은이들은 명절의 불꽃놀이처럼 깊은 어둠 속에서 당당한 몸짓을 터트렸다. 사람들은 슬픔을 미소로, 패배를 경쾌한 분위기로 감추기 시작했다. 필리핀을 정복한 미군은 이 나라의 진기한 건축물과 원시적인 배관, 형식적인 예의범절을 우습게 여겼으나, 필리핀 사람들은 무덤덤한 얼굴 뒤에 은밀한 자부심과 환희를 품고 길고 긴 전사자 명부를 공유했다.”(149)
<의장대>에서는 나탈리아라는 인물이 조시라는 인물과 시간을 통과해서 동시에 존재하는 듯한 모호한 설정이 재밌는 작품이다. 그런데 결말을 보고 나면 작품의 의미가 미궁 속으로 빠지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이 작품집을 통해 필리핀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것은 모호함이라는 특징이 그들의 정체성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동서양이 뒤섞이고 토속 문화와 가톨릭 문화가 융합되어서 뭐라고 정의할 수 없고 규정하기 힘든 그들의 정체성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것이 바로 이 책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