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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제목으로 오해하지 말고 일단 읽어보기를

by 초콜릿책방지기

500쪽에 달하는 긴 분량에, “순교자”라는 민감한 제목을 달고 있는 이 소설은 놀랍게도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말로 시작한다. “맙소사, 우리가 죽는다는 사실이 방금 떠올랐다.”는 이 문장을 제사(題詞)로 사용하면서 시작되는데, 주인공은 당장이라도 죽고 싶지만 자신의 죽음이 의미 없는 자살로 남기는 바라지 않는 인물이다. 자신을 낳은 엄마가 타고 있던 이란의 민항기를 전투기로 오인한 미국 미사일에 맞아 공중에서 사라져 버렸는데, 그저 먼지가 되어 버린 그 죽음이 공허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생후 넉 달 만에 어머니를 잃은 주인공 사이러스를 키우기 위해 아버지 알리는 미국으로 가서 양계장에서 일하다가 사이러스가 성인이 되자마자 죽는다. 사이러스에게 부모의 죽음은 의미 없는 것으로 느껴지기 때문에 자신은 ‘순교자’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 중요한 죽음, 의미 있는 죽음을 위해서 “자기가 믿는 것을 위해 죽은 온갖 사람”을 연구하는데, 그 와중에 자기 죽음을 전시하는 예술가인 오르키데의 기사를 읽고 그녀를 만나러 간다.


살아야 하는 의미를 찾지 못하는 것처럼 그냥 죽어야 하는 의미도 알 수 없는 사이러스. 그가 찾아 헤매는 의미를 결국 삶의 의미였는데 본인은 그걸 자각하지 못한다. 그러나 오르키데와의 만남이 그에게 준 거대한 깨달음은 –소설의 대반전이기도 한데- 그의 어머니가 사랑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던 사람이고, 어머니를 사랑했던 사람인 레일라도 마찬가지였다는 사실이다. 이란 사회가 점점 더 폐쇄적으로 변해가고 있던 상황에서 동성을 사랑하게 된 어머니가 목숨을 걸고 탈출하려고 했던 시도가 결국 민항기 격추 사건으로 연인을 잃게 되었는데, 어머니는 그림을 그리는 행위를 통해 그 아픔을 승화시키게 된다.


로야라는 원래 이름을 버리고 오르키데로 거듭난 사이러스의 어머니는 비록 사랑을 잃었지만 미국이라는 사회에는 예술가로 정착하게 된다. “…내가 예술에 삶을 바치는 건 예술은 남기 때문이에요. 그게 나예요. 예술가. 예술을 하죠.”(295)하고 말하는 오르키데는 자기 삶의 의미를 거기서 찾았고, 죽음의 의미마저 획득한 사람이 되었다. “예술은 시간이 망칠 수 없는 것이니까요.”(295)


사흘 동안 오르키데가 있는 미술관을 찾아가서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사이러스는 여전히 명확한 의미를 찾을 수가 없다. 그래서 자신과 기꺼이 동행해 준 지 노바크의 마음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이미 사랑을 발견했던 오르키데에게는 자기 정체성을 찾아 헤맬 필요가 없었지만, 어떤 것으로도 규정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끊임없이 의식하면서 사이러스는 혼란스러울 뿐이다. 그 혼란을 잠재우거나 잊기 위해 술과 약물에 취해 있다가 간혹 시를 쓸 뿐이다.


“사이러스가 조금이라도 현재성을 정말 느낄 때는 약을 할 때뿐인 것 같았다. 지금이 심리적으로나 화학적으로나 전과 구분될 수 있을 때. 그럴 때가 아니면, 그는 완전히 시간에 잠식되는 기분이었다. 탄생과 죽음 사이에, 그가 한 번도 제대로 발을 딛지 못한 어떤 간극에 끼인 채로, 그는 또한 세상과 세상의 체크 박스에 잠식되어 있기도 했다. 이란인도 미국인도 아니고, 무슬림도 무슬림이 아닌 것도 아니며, 취한 것도 유의미하게 회복된 것도 아니고, 게이도 이성애자도 아닌 채로, 모든 진영에서 사이러스가 다른 진영에 너무 깊이 속해 있다고 생각했다. 진영들이 있다는 사실 자체에 그는 머리가 어지러웠다.”(399)


상실과 허무, 정체성의 혼란으로 인한 알코올과 약물 중독, 우울증과 불면증에 빠져 있는 사이러스에게 뉴욕에서 나흘째 되던 날 맞이한 오르키데의 죽음으로 알게 된 진실은 그의 삶을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한다. 자기 어머니의 삶이 사랑으로 채워져 있었다는 사실과 미국에서의 삶은 자신의 이름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살아왔다는 사실이다. 어머니 또한 자기 동일시된 정체성으로 살지는 않았지만, 그녀를 지탱해 준 의미로 충분했다는 것이다. 이제 그 사실을 통해서 사이러스는 자기 삶의 의미를 발견한다. 자기를 채워줄 사랑을 비로소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우주에서 자비로운 것은 무엇이든 지 안에 살고 있다는 것을, 사이러스는 갑자기 깨달았다. 지가 그를 안고 이해하고 아는 그 방식. 은혜. 사이러스가 어떤 새나 나무나 벌레를 보면 지는 어떤 개념이 아니라 정말로 그 새나 나무나 벌레를 보았다. 지는 정말로 사이러스 이면의 이면에 있는 사이러스를 보고 들었다. 사이러스는 지가 사이러스 자신의 영혼을 지배하고 좀먹는, 주춤거리는 불안에 방해받지 않고 삶을 헤쳐나가는 게 좋았다. 이 사랑이 갑작스럽고도 전면적으로 압도해오며 아찔함을 느꼈다.”(509)


그렇다면 그에게 남은 죽음들의 의미도 알게 된 셈이다. 어머니의 죽음은 분명히 사랑이었으며, 아버지의 죽음조차 사랑이다. 어머니의 죽음은 스스로 발견한 사랑으로 자신을 채운 의미가 있었다고 한다면 아버지의 죽음은 자기 공허를 이겨내고 사이러스를 살게 만들었다는 데에서 의미가 있다. 그렇게 보면 이 책의 제목 ‘순교자’의 의미가 받아들여진다.


그리고 책의 덮는 순간, 마지막에 인용된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문장이 선명하게 다가온다.

“맙소사, 우리가 죽는다는 사실이 방금 떠올랐다. 하지만 – 하지만 나도?! 우선은 잊지 말기를. 지금이 딸기 철이라는 것을.”(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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