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렌 식수의 아름다운 문장들을 만나는 시간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글은 어렵다.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단번에 알아차리기 힘들기 때문이다. 마치 우리와 다른 행성에서 온 것처럼, 혹은 아주 먼 미래에서 온 것처럼 말하고 있어서 우리에게 익숙하던 문법으로는 그 의미를 쉽게 파악하기가 힘들다. 그녀는 어디에 있는 걸까. 어디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클라리시의 글을 읽다 보면 그런 질문이 떠오른다. 대답을 쉽게 찾을 수 없는 우리에게 엘렌 식수는 말해준다. ‘리스펙토르의 시간’은 우리가 잊고 있어서 잘 떠올릴 수 없는 어떤 순간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그 순간을 인식하게 되면 물질문명으로 꽉 찬 곳에서 무감각하게 살고 있는 우리가 진정한 생명력을 되찾을 수 있는 길을 만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엘렌 식수의 문장은 우리가 알던 서평의 글쓰기와 다르다. 리스펙토르을 알고, 알려주기 위해서, 가장 적합한 문장을 고른 것이다. 명징하게 한 줄로 요약할 수 있는 메시지를 향해 가거나, 이성으로 쌓아 올리는 논리 구조를 따라가지 않는다. 이제는 우리에게 낯선 세계인, “이성 이전, 신 이전, 희망 이전”에 대해 말해야 하기 때문에 그런 문장으로 말할 수는 없다. 분명히 시적 언어여야만 하고, 피할 수 없이 여성적 글쓰기여야만 한다. 깊고, 열려 있고, 평등하고, 고귀하고, 고유성을 갖고 진화하는 글로 보여줘야만 한다.
태초의 이브가 베어 문 사과와 리스펙토르의 사과는 연결되어 있고, 엘렌 식수에게로 와서는 오렌지가 된다. 이브가 “금단의 열매”인 사과를 받아 들고, 하나님, 법, 절대적 말씀, 그 이해 불가능한 메시지에 복종해야 했을 때, 눈에 보이지 않고 실존하지 않는 그 법 앞에 있는 현존하는 사과를 베어 무는 것, 그 내면을 발견하는 것이 태초의 시적 상징이다. 그 사과를 받아 들고 리스펙토르는 잊고 있던 실존을 일깨운다.
엘렌 식수에게 온 그 사과는 이제 오랑과 이란을 품고 변형되어 오렌지가 되었지만, 그 의미는 그대로 남아있다. 그래서 리스펙토르는 신과 전쟁을 벌였던 이브를 넘어서, 현대의 신적 존재처럼 엘렌 식수에게로 온 것이다. 이것은 신을 모욕하는 불경한 의미가 아니다. 하늘과 나와 땅이 하나로 통하는 에피파니의 순간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순간을 발견하도록 애쓰는 것이 우리의 생명력을 회복하는 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인간이 이루어놓은 마천루, 하늘에 닿기 위한 딱딱한 돌덩어리들, 그것을 위해 흘리는 수많은 피의 세계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래를 하는 중이다.
새로운 노래는 익숙하지 않다. 낯선 음률은 귀에 설어서 잘 들려오지 않는다. 그래서 기존의 나를 버리고 바깥으로 가서, 미끄러져 가서, 새로운 기호로 들어야 한다. 그것을 들으려면 장미의 심장을 만질 수 있는 방식으로, 사다리 아래 깊숙한 내면으로 파고 들어가야 한다. 이미 익숙한 믿음을 버리고, 전혀 새로운 세계의 노래를 들으려면, 우리는 “울면서 믿어야” 한다.
그래서 이제 나는 리스펙토르의 노래와 엘렌 식수의 글쓰기를 울면서 믿는다. 그들이 있었던 곳에 함께 있고 싶어서, 믿으면서 운다. 그들이 조심스럽게 만진 그 신비로움 속으로 잠깐이라도 들어가 보고 싶어서 한 번 더 그것을 읽는다.
“글쓰기란 신비를 건드리는 것이다. 신비를 짓밟아 진실에 반하는 일이 없도록 말의 끝으로 조심스레 만지는 것이다.”(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