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삶과 죽음을 연결하는 것은 오직 사랑
“우리는 우연히 살고 우연히 죽는 것일까, 아니면 계획에 의해 살고 계획에 의해 죽는 것일까.”(15)
삶의 죽음의 신비를 탐구하는 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영원한 과제일 것이다. 영원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 신비에 대한 답을 그 누구도 명쾌하게 제시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죽음이 있기 때문에 삶이 더 소중하고, 삶이 있기 때문에 죽음이 의미를 갖는 영원한 굴레 속에서 존재한다는 점만 바뀌지 않을 뿐이다. 이 소설은 삶과 죽음을 이어주는 다리처럼 보이기도 하는, 하나의 다리가 끊어지면서 시작한다.
1714년 7월 20일 금요일 정오, 리마와 쿠스코를 잇는, 페루에서 가장 먼진 다리였던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가 갑자기 무너져서 다섯 명의 여행자가 죽었고, 그 장면을 목격한 주니퍼 수사는 그들이 갑자기 그렇게 죽은 이유를 밝히겠다고 마음먹는다. 다리의 붕괴로 사람이 죽은 것은 순전히 불가항력적인 ‘신의 행위’이므로 그 이유를 밝혀내면 신의 의도를 알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주니퍼 수사는 엄청난 조사 끝에 방대한 책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그렇게 부지런히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주니퍼 수사는 도냐 마리아가 살면서 가장 간절하게 몰두한 것이 무엇인지 결코 알지 못했다. 피오 아저씨에 대해서도, 에스테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보다 훨씬 더 많이 안다고 주장하는 나조차도 샘 속에 숨겨진 더 깊은 샘을 놓쳤을 수 있다.”(19)
소설은 주니퍼 수사가 조사한 내용이 무엇인지 말해주듯, 다리에서 죽은 다섯 명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간다. 먼저 도냐 마리아 몬테마요르 후작 부인이 쓴 편지가 사후에 스페인 문학에서 기념비적 작품이 되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러나 우리가 언제나 신의 의도를 곡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아름다운 편지를 통해 실체와 동떨어지도록 그녀를 미화한다는 것 또한 말하고 있다.
사실 그녀는 엄청난 부잣집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어머니와는 불화를 거듭한 데다 말을 더듬는 못생긴 여자여서 독신으로 살려고 했지만 시대적 규범 탓에 결혼의 굴레 속으로 들어가게 된 불행한 여자였다. 그녀는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딸, 클라라에게 모든 사랑을 쏟아부었지만 딸은 엄마에게서 벗어나기 바빴다. 언제나 일방통행으로 가던 몬테아요르 후작 부인의 사랑은 딸 클라라가 아기를 가졌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 증폭된다. 후작 부인은 평소에 하던 딸을 위한 기도가 충분치 못하다는 생각으로 산타 마리아 데 클루삼부쿠아 성지로 순례를 떠난다. 자신을 보살펴주던 페피타를 데리고 가는데, 우연히 페피타가 수녀원장님에게 쓴 편지를 보고 무언가를 깨닫는다. 그동안 자신은 한 번도 “인생에서든 사랑에서든 용기를 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이제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기 위한 결심을 하고 딸에게 이전과 다른 마지막 편지 –본인은 ‘첫 번째 편지’라고 칭한-를 쓰고 난 후, 페피타와 함께 다리를 건넌다.
페피타를 돌봐주던 수녀원장님은 버려진 쌍둥이 형제도 거둬주었는데, 둘은 성인이 된 후 수녀원을 나와서 필경사 일을 하며 지낸다. 마누엘과 에스테반 형제는 둘만의 비밀 언어를 고안할 정도로 서로에게만 친밀감을 느끼며 살아간다. 하지만 어느 날 마누엘이 카밀라 페리촐레라는 여배우를 사랑하게 되면서 어긋나기 시작한다. 에스테반이 생각하기에 사랑은, “가장 완벽한 사랑에조차 한쪽이 다른 한쪽을 덜 사랑한다는” 명백한 한계를 갖고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마누엘을 이해하기 힘들다. 불행하게도 마누엘은 쇳조각에 무릎이 찢어져서 파상풍으로 죽게 된다. 마누엘을 헌신적으로 돌보던 에스테반은 혼자 남겨진 세상에서 살아갈 수가 없어서 자살을 기도한다. 그런 에스테반을 살리기 위해 평생 자신의 딸을 찾아 헤매던 알바라도 선장이 자신과 함께 떠나자고 한다. 그들은 함께 떠났지만 에스테반만 다리를 건넌다.
마누엘이 사랑에 빠졌던 카밀라 페리촐레에게는 피오 아저씨가 있었다. 그는 카스티야 지방 명문가의 사생아로 태어나, 열 살에 집을 떠난 후 세상을 떠돌면 혼자 살아왔다. 그에게는 세 가지 삶의 지향점이 있었는데, “다채롭고 은밀하고 전지적인 존재가 되고 싶은 욕망”과 미인을 숭배하는 것, 문학과 걸작들, 연극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고 싶은 것이었다. 피오 아저씨는 떠돌다가 우연히 자신의 삶의 지향점을 충족시켜 줄 선물, 카밀라 페리촐레를 발견하고 그녀를 키워낸다. 열두 살의 나이에 카페에서 노래를 부르던 볼품없는 소녀를 찾아내어 배우로 성공시킨 것이다. 성공한 후 카밀라는 피오 아저씨와 떨어지고 싶지만, 그는 어떻게든 그녀를 찾아내었다. 그를 거부하는 카밀라에게 사정해서, 그녀의 아픈 아이인 하이메만이라도 1년 동안 함께 있게 해 달라는 허락을 얻어낸다. 그리고 둘은 떠나기 위해 다리를 건넌다.
그러고 나서 남은 사람들, 다리를 건넜던 다섯 사람이 사랑했던 사람들이 한 곳에 모인다. 피오 아저씨와 하이메가 사랑했던 카밀라, 페피타와 에스테반이 사랑했던 수녀원장, 몬테마요르 후작 부인이 사랑했던 도냐 클라라가 한 곳에 모여, 그들의 지나간 사랑에 대해 말한다. 누군가는 자책하고, 누군가는 속죄하며 자신들에게 주어졌던 사랑에 대해 생각한다. 비록 그들이 제대로 사랑을 하지는 못했지만, 사랑이라는 의미 하나는 기억에 남아있다. 그리고 명백한 것은 죽은 사람들은 곧 잊힐 것이고, 남겨진 사람들도 곧 지상에서 사라질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이제 그들이 사랑해야 할, 눈앞에 있는 병든 사람들이다. 그들을 사랑하는 것 또한 전적으로 각자의 몫이다.
“모든 사랑의 충동은 그것을 만들어 낸 사랑으로 돌아간다. 사랑을 위해서는 기억조차 필요하지 않다. 산 자들의 땅과 죽은 자들의 땅이 있고. 그 둘을 잇는 다리가 바로 사랑이다. 오직 사랑만이 남는다. 오직 사랑만이 의미를 지닌다.”(207)
여기에 무슨 말을 더 얹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