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고 굵게 똬!
아주 공교롭게도 모임이 열리기 전날 밤, 악몽을 꿨다. 모임을 위해 이 소설을 한 번 더 들여다보고 나서 잠이 들었는데, 꿈에서 극단주의 집단 사람들에게 사정없이 쫓기고 있었다. 그들에게 나 또한 페미니스트라도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었다. 어떤 가치라도 극단은 언제나 공포라는 것을 꿈에서도 알 수 있었다.
소설의 주인공처럼 강요당한 채식이 괴로워서 끝없이 육식을 떠올리는 상태가 아니라도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나를 둘러싼 사회나 집단이 강요하는 가치는 수시로 바뀌는데 그걸 재빠르게 수용하지 않으면 뒤처진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유행이라는 이름으로 부드럽게 강요해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도덕적 가치라고 어떤 기준을 만들어서 그걸 따르지 않는 개인은 무지한 상태에 있는 것처럼 만들면 사는 게 힘들어진다. 절대적인 선과 악에 대해 말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시대에 따라서 변하는 것인데도 마치 선악을 모르는 것처럼 만들어버렸으므로 주인공은 육체적인 고통도 고통이지만 정신이 무너져버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채식도 그렇고 페미니즘, 민주화 운동 등등의 시대적 담론들이 모두 당면한 과제일 것이고 틀린 것은 없지만, 그것이 주류가 되는 과정에서 수용하는 개인에게는 폭력적일 수 있다. 특히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그래서 이 소설에 등장하는 톰 두부와 육수맛내기 모두 다 주인공에게는 선구자나 구루가 아닌 선동자일 뿐이다.
사실 화자의 진술을 따라가다 보면 무력감에 빠져들면서 삶의 의지마저 조금씩 사그라드는 기분까지 든다. 그래서 마지막의 반전이 잔인함에도 불구하고 무의식적 쾌감이 생기는 지도 모르겠다. 우리를 대신해서, 무의식에 있던 또 다른 나인 것 같은 화자가 해방해 준 것 같은 카타르시스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악몽 속에서 따라다니던 극단주의 집단을 향해 소설의 주인공은 나를 대신해서 이미 복수를 해냈다. 어차피 우리의 육체는 결국 마르게 되고 영광도 같이 사라지게 되니 주인공이 마지막에 그들 모두가 옳다고 말한 것에도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