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잔하게 스며드는 이야기
생존의 문제가 걸려있을 때 인간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가 무엇일까. 그런 절박한 상황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야말로 인간에게 정말 소중한 것이 아닐까. 이 책을 읽다 보면 문득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전쟁이나 재난 상황 아래에 있을 때 혼자서 살아남기 위해 버둥거리는 사람도 있고 그 와중에도 타인의 안위를 신경 쓰는 사람도 있다. 어느 쪽이 더 나은지에 대해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보호하는 것도 타인을 챙기고 공동체를 유지하려는 것도 모두 인간이 가진 본능일 텐데, 어느 쪽이든 살아가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런데 쉬성과 같은 사람이 있다면 좀 더 삶에서 의미를 찾아보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쉬성이 처한 상황도 기아라는 생존의 문제가 걸려있다. 굶어 죽지 않으려고 가족과 함께 살던 마을을 탈출한 쉬성은 운 좋게 살아남았지만 아버지와 어머니, 동생의 생사를 알지 못한다. 삼촌이 거둬준 덕에 공업학교를 나와서 공장에 취직하게 된다. 공장에서 일하면 적어도 굶어 죽지는 않으니, 쉬성은 공장을 자기 집처럼 여기며 다닌다.
일을 많이 시키고 부당한 일들이 벌어지고 페놀 공장이라 암에 걸리는 일 따위는 감내할 수 있다. 아마도 주어진 운명이 그렇겠거니 하며 살아가는 것일 것이다. 어찌 보면 당시에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가장 평범한 인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쉬성이 가진 특별한 점이 하나 있는데, 주변 사람들을 위해서 보조금 타는 것을 나서서 돕는다. 도움을 받은 사람들이 딱히 쉬성에게 고마워하지도 않고 기억하지도 않는다. 스바오 같은 사람은 기억하더라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세상은 쉬성의 호의나 선한 의지에 크게 영향을 받는 것 같지 않아 보인다.
그래도 쉬성에게는 자신을 아껴주던 사부가 있다. 사부는 쉬성을 보살펴주고 자기 딸까지 맡긴다. 쉬성은 동료인 건성이 사부의 딸인 위성에게 마음이 있는 것을 알고 결혼을 주저한다. 하지만 건성도 사부도 쉬성이 위성을 위한 좋은 남편이라는 걸 안다. 역시나 둘은 쉬성과 위성은 잘 지내고, 위성은 쉬성에게 조상을 기리는 제의를 알려주면서 가정교육도 해준다. 워낙 몸이 약했던 위성이 아이를 낳지 못하자 쉬성의 친척 아이를 데려와 딸로 삼고 언청이 수술도 해준다. 딸인 푸성은 둘 사이에서 씩씩하게 자라난다.
페놀 공장이 주식회사가 되고 사람들은 끊임없이 뭔가를 사야만 하는 세상으로 변하고, 대표적 악인이던 쑤샤오둥은 공장장에서 대주주가 된다. 직공들은 출자하지 않으면 공장을 나가거나 힘든 조건으로 밀려나야만 한다. 평생 공장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건성처럼 문화대혁명 때 누명을 쓰고 옥살이를 하거나 왕싱메이처럼 의문사하거나 사부처럼 암으로 세상을 뜨는데, 쑤샤오둥의 앞날은 밝기만 하다. 공장은 점점 커지다가, 경쟁 공장이 들어서서 무너지는가 싶더니 이내 둥순유한공사가 되어 부동산으로 큰돈을 번다. 쉬성은 경쟁 공장을 세울 때 도면을 그려주면서 돈을 좀 만지게 되고, 집도 마련한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체로 현실의 인물들처럼, 착한 일을 했다고 복을 받지도 않고 악한 사람이라고 벌을 받지도 않는다. 그저 각자 정해진 운명의 길을 충실히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그리고 그런 곳에서 작동하는 가치는 그저 자연 그대로의 상태이며 우리가 바라는 숭고한 가치는 큰 효력을 발휘하지 않는 듯하다. 그래서 보통 리얼리즘 소설에서 보는 아이러니나 페이소스를 통한 비극적 카타르시스도 느껴지지 않는다. 심지어 위성을 묻어주기 위해 길을 나선 쉬성이 우연히 만난 동생 윈성조차 가짜 스님이다.
둥순유한회사가 만든 가짜 절에서 스님 노릇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쉬성이 말했을 때, 윈성은 가짜와 진짜 절의 구분은 무의미하다고 한다. 그런 바깥의 구분보다는 그 안에서 불공을 드리는 사람의 경건함과 행복이 진짜인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는 국가 제도든 사회 시스템이든 종교의 형태든, 대체로 인간을 박해하는 방식이거나 허위일 뿐이지만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그 모든 것을 감내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런 조건에서 살아가려면 인간성의 바닥을 보며 살아가게 마련이고 숭고한 가치에 대해서는 생각할 여지가 없다. 그래서인지 이 소설에서는 부모 자식 간의 사랑도 그렇고 남녀 간의 사랑도, 사람들 사이의 우정도 감정의 농도가 느껴지지 않는다. 때로는 그저 의무를 다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생존을 위한 가장 중요한 가치가 바로 ‘자비’가 아닐까. 어떤 관계의 맥락에 있든 내 고통에 앞서 타인의 고통을 한 번 더 들여다볼 수 있는 그 마음이 있다면 아무리 척박한 상황에 놓여있더라도 살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주인공 쉬성을 둘러싼 여러 형태의 자비를 볼 수 있어서 이 소설의 제목이 ‘자비’가 되어야만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