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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쉬러 나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지 오웰을 읽는다면

by 초콜릿책방지기

이 책을 읽기 시작하기 전만큼 한 작가에 대해 복잡한 마음이 들었던 때는 없었다. 모임을 위해 이 책을 읽으려고 하는 찰나에 조지 오웰의 이름 뒤에 숨겨져 있던 그의 아내의 이야기가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아내 아일린에 대한 책은 대략적인 소개만 봐도 조지 오웰이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던 작가와는 사뭇 동떨어진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어떤 편견 혹은 하나의 기준을 가지고 책을 읽기 시작하면, 모든 문장이 그쪽으로 수렴된다. 공교롭게도 작가의 이름과 똑같은 주인공 “조지” 볼링이 화자인 이 소설은 아일린의 영향 덕분에 화자를 작가와 동일시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매우 불신하게 되는 효과까지 낳게 되었다. 화자를 믿지 못하는 데다 비판적인 인식을 가지고 읽기 시작하니, 뚱뚱한 중년의 바람둥이 화자에 대해 충분히 거리감을 두고 읽을 수 있었다.


그렇게 읽다 보니 화자가 여성에 대해 묘사하고 있는 태도만큼이나 자신에 대한 태도 또한 과장되어 있다는 것이 보였는데, 그걸 알고 나니 조지가 애잔해 보이기 시작했다. 1900년대 초반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고 난 후 2차 대전이 시작되기 전, 급속도로 진행되던 산업화와 자본주의 시대의 혼란한 시기 가운데 있던 그 인물이 어쩐지 우리와 별로 다르지 않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는 불안이 인간 존재의 기본 요소라고 말하는데, 우리는 그것에 대해 깊이 동의한다.


“불안은 인간 존재의 기본 요소와도 같다. 실직의 공포에 시달리지 않는 사람은 전쟁이나 파시즘이나 공산주의 같은 것 때문에 시달릴 것이다. 히틀러 생각을 하면 식은땀이 나는 유대인들처럼 말이다.”(30)


조지 불링이 지나간 시절을 그리워하면서 현실의 팍팍함을 잊으려고 고향인 로어빈필드를 찾아간 것은 다만 그 시절이 아름다웠기 때문이 아니라, 불안을 모르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는 나름 행운의 사다리를 올라가서 촌구석 하층민에서 장교까지 올라간 사람이었고, 적당한 집과 변변한 집도 있는 상태이지만, 언제라도 닥칠 변화에 대한 불안을 항상 안고 살아간다. 그 불안은 그의 아버지가 말년에 경험했던 급속한 경제 성장에 적응하지 못한 도태일지도 모르고, 파시즘으로 엄습해 오는 전쟁의 위협일지도 모른다. 어떤 것이든 이제 그가 살고 있는 현재와 다가올 미래는 이전 세계와는 전혀 다른 것인데, 그가 과거를 떠올리며 알아챈 치명적인 차이점은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그건 다름 아닌 안정된 시기, 문명이 코끼리처럼 네 다리로 서 있는 듯한 시기, 그래서 내세 같은 건 아무래도 그만인 시절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자신이 아끼는 것들이 계속해서 이어진다면 죽는 게 별로 억울하지 않다. 살 만큼 살아봐서 더 살자니 좀 지겹기도 하니 이제 땅으로 돌아갈 때가 됐나 보다, 하는 식으로 생각하곤 했던 것이다. … 그들은 자신이 서 있는 지반 자체가 흔들리는 느낌을 모르고 살았다.”(172)


그러니까 자신의 뿌리가 흔들리는 느낌, 근본이 사라지는 것 같은 그 경험은 조지 이후에 지속적으로 이어져서 우리는 이미 그런 세계가 익숙한 듯 살아가고 있다. 불안과 우울은 침대 옆에 누워있는 연인보다 더 친밀해서 우리에게는 오히려 그것이 사라지는 것이 어색할 지경인데, 처음 그 시대를 인식한 조지에게는 변화가 무척이나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지금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가부장이라는 가치관조차 그 시대를 공고하게 받치고 있었던 틀이었다면, 당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대체로 그것이 안정된 밑받침이었을 것이다. 시대의 불운으로 사라져 버린 조지 오웰의 아내 아일린의 존재를 이제야 알게 되었다는 것은 지금 시대의 안타까움일 것이다.


주인공 조지가 현실의 불안을 잊기 위해 찾아간 과거의 장소에서 확인하게 되는 것은, 끔찍하게 변해버린 모습뿐이다. 언제나 여름으로 기억되던 엘시 워터스도 그렇고, 어린 시절 가장 큰 물고기를 낚았던 호수 모두 이전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다. 언제나 과거의 시만 읊어대는 친구 포티어스와 있을 때 편안함을 느끼던 것처럼 조지는 세상의 변화를 선뜻 받아들일 수 없었지만, 과거의 변화조차 눈으로 확인한 이상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차를 몰고 언덕을 내려오며 생각한 것 하나. 이제 과거로 돌아가본다는 생각일랑은 끝이다. 소년시절 추억의 장소에 다시 가본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런 건 존재하지도 않는다. 숨 쉬러 나가다니! 숨 쉴 공기가 없는데. 우리가 살고 있는 쓰레기통 세상의 오염은 성층권에까지 도달해 있다. 아무렴 어떤가. 나는 특별히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342)


이미 숨 쉴 공기가 없는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세상이 안정적으로 계속 이어진다는 느낌이야말로 과거의 이야기일 뿐이다. 이것은 과거의 이야기이므로 그 시대의 한계 또한 담보하고 있기도 하다. 조지 오웰이 당대의 한계 안에 갇힌 작가라는 것이 실망스럽기도 한 동시에 당대의 변화를 예민하게 인식하고 있었던 작가라는 것 또한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 소설의 화자가 말하고 있는 것에 아일린의 목소리도 포함된 것이라는 것만 잊지 않으면 될 것 같다. 사실 그들이 말하고 있는 것이 좋은 것이 너무 많아서 버릴 수가 없다.


“그들은 다가올 것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없다. 위협이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코밑까지 닥쳐도 안 보일 것이다. 그들은 영국이 절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영국이 세계 전체라고 생각한다. 자투리라는 것을, 어쩌다 폭격을 피한 외진 한구석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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