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 자본주의 시스템 아래에서 먹는 문제의 엄밀함에 대하여
바르게 산다는 것, 정의롭게 산다는 것은 참 어려운 문제라는 걸 깨닫게 되기 시작하는 건 자본주의 시스템과 무관하게 살 수 없다는 걸 알게 되는 것과 궤를 같이 하는 것 같다. 아이에게 유기농 음식을 먹이기 시작하면서 지역 농산물이라든가 생협을 알게 되고, 탄소발자국이라든가 동물복지에도 자연스레 관심을 갖게 되었다. 약간의 불편을 감수하더라도 가까운 곳에서 생산된 농산물을 먹고 동물복지 달걀과 우유, 고기를 소비하면서도, 그것이 과연 괜찮게 사는 것인지에 관한 몇 가지 문제들이 항상 마음에 걸리곤 했다.
동물복지에 관심이 있더라도 기존 생산품에 비해 더 비싼 돈을 내고 그것들을 살 수 있는 경제적 여건이 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이런 작은 노력은 거대한 자본 앞에서 과연 얼마나 효과가 있을까, 동물복지라는 것은 우리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그림과 비슷하기나 할까, 개인의 실천보다는 시스템을 바꾸는 쪽으로 더 애쓰는 편이 낫지 않을까, 그러니까 ‘정의로운 식탁’의 문제점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더라도 정의롭게 살 수 있도록 만들 수는 없는 것일까, 결국 이런 문제들은 소수의 연구자들과 먹물을 조금이라도 먹은 사람들끼리만 나누는 신념이 아닐까, 하는 것들이 계속 목 안의 가시처럼 걸려있다.
인간의 생존에 가장 기본이 되는 먹는 문제가, 우리를 둘러싼 세계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있느냐로 좌우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무력감이 밀려온다. 공장식 축산에 대해, 가려져 있던 식품 가공품의 진실에 대해, 구조적 폭력에 대해 모르고 있다면 정의롭게 살지 못하게 된다는 사실 자체가 시스템의 희생자들이라는 걸 반증하는 셈인데, 그 사실을 안다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미 후기 자본주의가 심화된 세계에서 익숙하게 살고 있는 우리 중 소수가 비건을 실천한다고 해서 시스템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줄 수 있을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역시 부인할 수 없는 사실 중 하나는 진실을 아는 것이 세상을 바꾸기도 한다는 것이다. 너무 거창하게 확장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예수와 부처, 알라와 같은 메시아적 존재들은 혼탁한 세상에서 구원의 진실을 알고 있다는 것으로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들에게서 영감을 받은 소수가 세상을 바꾸기 시작한 것도 사실이니까 말이다. 무력감 앞에서 때로는 단순한 믿음이 세상을 변화시키기도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니까 이 정도로 막연하고 비현실적 상상력을 발휘하지 않는 이상, 시스템은 바뀌지 않을 것 같다는 말이다. 이 책의 저자들이 제시하는 대안도 역시 그런 맥락이라고 생각한다.
“조금 거친 이야기일 수는 있지만, 앞서 언급한 가치를 좇고자 하는 생각과 행동이 좋은 바이러스처럼 퍼져서 더 많은 사람이 참여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또한 공동체의 회복력을 강화하고 더 민주적이고 수평적인 과정을 통해 성장하면서 자연과 다른 종들을 고려하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공동체로서 우리의 회복력과 연민을 드높이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며, 기후위기와 그로 인해 닥칠 사회 붕괴에 보다 힘 있게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게 해준다. 이러한 노력들을 통해 현재의 시스템에 위험 신호를 보내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땅과 인간, 다른 동물들에 계속해서 구조적 폭력을 가하는 제도와 절차를 없애는 것이다.”(320)
이 책을 읽은 우리는 좋은 바이러스를 퍼트리는 역할을 해야 하는데, 슈퍼 바이러스가 앞길을 막거나 좋은 바이러스를 다 파괴한다고 해도 그저 좋은 바이러스로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일단 살아남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