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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이라 그랬어>

어른이 되어 말하는 안녕의 의미

by 초콜릿책방지기

동시대 한국문학을 읽는 것은 동질감을 느끼는 동시에 당대의 가장 선명하고 대표적인 풍경을 감상하는 일이다. 인물들에게 벌어진 일을 마치 내 일처럼 감정을 이입해 보면서도 한편에서는 그 장면을 박제해서 타인의 일인 양 바라볼 수도 있다는 것이 감상의 즐거움이다. 그게 동시에 가능한 것은 대체로 동시대의 모든 정보를 실시간으로 공유하게 되는 현시대의 특징 덕분이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도 <빗방울처럼>의 지수와 수호가 되지 말란 법이 없지만, 또한 되지 않았음에 깊이 안도하며 거리감을 만들어낸다. 그런 기사를 실시간으로 접하며 아찔한 감정을 느끼다가 그들처럼 수렁에 빠지지 않은 것이 단지 행운이 아니라 내가 더 많은 정보를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믿어버린다. 그렇게 선을 그어버리면 쉽게 그들의 아픔에 등을 돌릴 수 있고 그들의 불행을 무능력으로 포장할 수 있다.


계급은 보이지 않게 은밀히 내면화되고 세분화되었지만 정보는 만인이 공유할 수 있다. 물론 그 방대한 정보의 양 중에서 돈이 되는 정보만 우리에게 오지 않을 테지만 말이다. 이전에는 비슷한 계급의 사람들끼리 모여 살면서 공유한 정보를 바탕으로 동질감을 강화할 수 있었다면, 지금은 다른 계급이 사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동경하거나 무시한다. 그래서 <홈파티>의 인물들처럼 그들끼리의 은밀한 만남이 필요하다. 자기들끼리의 연대를 강화하면서 그 계급에 속하지 못한 사람들은 잘못된 판단 때문에 그렇게 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서로를 통해 확인한다. 오대표처럼 고아원에 봉사하러 나가며 도덕적 충족감을 느끼는 동시에 가난한 사람들이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들의 무지와 무능력 탓으로 돌린다. 이연은 그들을 보며 연기를 위한 힌트를 얻으면서 동시에 생각한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자리에 서보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24)


사실 타인의 입장이 되기 어렵다는 것은 계급적 문제뿐 아니라 세대의 차이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레몬케이크>의 기진이 초등학교만 나온 엄마 선주를 보며 느끼는 마음은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 수 있다. “나의 오늘과 당신의 오늘이 다르다는 자명함이, 엄마의 하루와 자신의 하루의 속도와 우선순위, 색감과 기대가 늘 달랐다는 게, 앞으로도 그럴 거라는 게 문득 뼈아프게 다가왔다.”(214)


그런 모습은 <이물감>의 기태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는데, 기태의 경우는 부모 세대와의 차이가 아니라 기성세대와 새로운 세대와의 차이로 좁혀진다. 기태는 새로운 세대가 호소하는 어려움이 단지 나이의 문제라기보다는 좀 더 복합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모든 문제가 그렇듯 대상을 단순화할수록 선을 긋기가 쉬운 법이다. 기태가 생각하기에 새로운 세대들은, “계급성은 지우고 나이라는 약자성만 내세운 채 신문에서 읽은 말로 앞 세대에게 자주 적의를 보이는 것 같았다.”(159)


정보의 양은 방대해졌고 접근도 쉬워졌지만 우리는 여전히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생각하고 싶은 것만 생각할 뿐이다. 기태가 SNS를 볼 때처럼 그 속에 나온 순간들은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아름다운 꿈처럼 보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동일시 대상을 선별하고 그 외의 것에는 질끈 눈을 감아버린다.


<좋은 이웃>에 언급된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한 대목을 생각하더라도 그 시대의 난장이들은 어딘가에 따로 존재했고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인간답게 살기 위한 투쟁은 일부에게만 삶과 결부된 일이었고 대부분은 더 나은, 부유한 삶을 위해 하루하루 살기 바빴을 뿐이다. 먹고사는 일이 해결되면 더 나은 삶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희망찬 미래였던 삶이 바로 지금이다. 난장이들의 존재를 잊고 살기 위해 애쓰던, 그래서 돈이라는 가치는 남고 이웃은 사라진 시대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한 목표보다는 그렇게 되기 위한 조건에 더 휩쓸리며 산다. <숲속 작은 집>에서도 프랭크와 나, 메이드와 나, 지호와 나의 관계뿐 아니라 엄마와의 관계에서도 선뜻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돈이 가장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하지만 <안녕이라 그랬어>에서 보는 것처럼 엄마의 간병을 위해 다른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김은미를, 그녀의 쓸쓸한 하루를 보면서 과연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을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어쩌면 김은미처럼 관계를 선택해버리고 나면 다가올 미래를 감당할 수 있을까 하고.


“그리고 이제 나는 헌수도 없고, 엄마도 없고, ‘다음 단계’를 꿈꾸던 젊은 나도 없는 이 방에서 ‘너한테 배웠어. 정말 많이, 정말 많이 배웠어’란 가사의 노래를 듣는다. 보다 정확히는 네가 아니라 너의 부재로부터 무언가 배웠다고, 그런데 여전히 그게 뭔지 모르겠어서 지금은 그저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내 쪽에서 먼저 원곡 위에 ‘안녕’이란 한국어를 덧씌워 부른다고. 우리 삶에는 그렇게 틀린 방식으로 맞을 수밖에 없는 순간이 있고 아마 나는 그걸 네게 배운 것 같다고.”(253)


<안녕이라 그랬어>를 보면 어른의 삶이란 무엇일까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된다. 헌수가 삶에서 짊어지던 것을 이제 김은미가 짊어지고 나아가는 걸 보면서, 어른이지만 여전히 어른이 되어가고 있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누군가의 안녕을, 혹은 평안을 잘 빌어줄 수 있을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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